“내 오늘 기필코 꽃을 보리라!”

“어 어 어흠! 세상에 나오고 사십이 넘어 푸른 봄을 사십 번을 넘게 만나 보았거늘 저리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는 새는 내 처음이로구나. 천상에 사는 선녀는 모두 잠든 밤 달빛 타고 내려와 깊은 산 맑은 소에 멱을 감는다 했는데 이 이름 없는 산비탈에 온 저 새의 이름은 무엇이려나?”
허문이 태연하게 응수를 했다.
“꽃도 이름 모를 꽃이 더 향기롭고 새도 이름 모를 새가 더 기이하거늘 아직 세속의 경문도 다 헤아리지 못하고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컹컹 짖는 견(犬)이려나! 더구나 부모를 잃은 고아가 누런 상복을 걸쳐 입었는데 그 눈에 보이는 꽃은 무슨 꽃인가 하노라?”
설화는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허문을 사정없이 비틀어 사납게 꼬집는 시 한수를 읊조렸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밤낮없이 짖는 견(犬)이면 좀 어떠랴! 본시 사람은 고아이거늘 누런 상복 걸쳤다고 꽃이 달리 보이겠는가? 그 꽃마저 볼 수 없을까 가슴 뛰노나!”
허문이 솔직담백하게 속마음을 내보이며 한결 헤집고 들어오는 시를 읊조렸다. 순간 설화는 저자가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기방에서 만나 서로 시문이나 주고받으며 노닥거린다면 며칠 밤은 지새워야할 위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설화는 지금 왕명을 받고 특수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설화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람이 본시 짐승과 다른 것은 예도를 알기 때문이라지. 그대는 지금 아버지를 여의고 그 슬픔 끝이 없는데 꽃을 보고 가슴 뛰는 것은 무례한 짐승이라도 된단 말이던가?”
설화는 허문을 한껏 꾸짖는 시를 읊조렸다.
“본시 효(孝)라는 것은 성현이 만든 인륜의 도리(道理)일 뿐 꽃을 보고 가슴 뛰는 것은 저 하늘이 준 천리(天理) 아니던가! 내 인륜을 따르랴? 저 천리를 따르랴? 내 천리를 따라 오늘 기필코 꽃을 보리라!”
그 시문을 들은 설화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허문이 껄껄 웃고 있었다.
“시묘살이를 하시는 분이 참으로 도가 지나치시군요?”
설화는 그쪽으로 가며 허문에게 말했다.
“아아! 참으로 세상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절세미인이시구려! 낭자! 허 허흠! 잠시 인륜을 따르고 있을 뿐 어찌 저 천리를 어길 수 있겠소. 보아하니 낭자도 보통이 넘소이다. 무슨 사연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내 알 바 아니지만 한바탕 혼탕하게 놀아 봅시다.”
허문이 설화의 얼굴을 보더니 그 미색에 놀라며 말했다.
“호호호! 그 핑계 또한 대단하시구려! 어느 누가 그 화려한 그 언사에 속지 않으리요! 그 또한 천리이려니….”
설화가 허문에게 쓱 다가가며 말했다. 허문이 설화의 손을 잡아 묘막 안으로 이끌며 말했다.
“오늘 꽃을 꺾어 내 마음에 깊이 꽂아 놓으리다. 꽃이 시들면 화병에 물이 마른 것이려니 그때는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때일 것이려니!”
“꺾인 꽃이 화병에서 며칠이나 산다던가! 그 잘난 시문(詩文)은 참 그럴 듯하구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수만 송이 꽃을 꺾었겠거니 그 빼어난 언설과 이름에 짓밟힌 꽃 헤일 수 없으리니 내 오늘 한 번 꺾이어 그걸 증명 하리라. 호호호호!”
그렇게 읊조리며 설화는 허문에게 달싹 안기었다. 진탕하게 낮거리로 허문을 제압한 설화는 오후 늦게 묘막 문을 닫고 나와 허문의 이름자 위에 검은 먹물을 붓에 잔뜩 묻혀 가위표를 그었다.
“마음보다 그 재주가 넘치는 사람치고 진실한 자가 드물다고 했으니…. 세상의 이치가 한 치 틀림이 없구나! 호호호호호!”
설화는 씁쓸한 미소를 삼켜 무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