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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그 넓고 깊은 숲(38) 여창지름시조 '단풍은 반만 붉고'

가장자리의 시간

2017년 09월 15일(금) 00:00
쌀쌀한 바람을 타고 가을이 온다. 창밖 먼 풍경 속 햇살은 여전히 쨍쨍거리며 거리에 내리지만 이미 여위어 있다. 이맘때의 이 쌀쌀한 바람은 나에게는 추석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알람과도 같다.
어린 시절, 아마도 초등학교 때인 듯싶다. 사춘기였을까? 어느 날 느낀 바람 속에 묻어있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 그리고 냄새가 지난 여름날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이후, 추석이 있었다. 그래서 그 때의 기억이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이런 느낌의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날이라고 해도 "추석같네"라는 말을 허공 속에 건네게 된다.
추석의 한 가운데 보다도 이즘의 쌀쌀한 바람이, 공기가, 향기가 더 추석같은 설렘을 준다. 바로 눈앞에 마주하며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보다 다가오는 것이 저만치에서 느껴질 때 마음은 더 설레고 쿵쾅거리고 노근야들거린다.
그렇게 저만치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좋은 것이 있다. 단풍구경 제대로 간 적 없는 나지만 아직 여름날의 끝과 가을날의 앞이 서로 겹쳐져 있는 이 때. 공원의 단풍잎이 아직 파란 온기를 가지고 있는 잔디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모습이 또 그렇게 좋다.
이렇게 아직 바짝 다가오지 못한 가을날의 풍경이 시조 '단풍은 반만 붉고'에 그려져 있다. 시조 내용은 이렇다.
"단풍은 반만 붉고 시내는 맑았는데 / 여울에 그물치고 바위 우에 누웠으니 / 아마도 사무한신은 나뿐인가(하노라)..."
가을을 속삭이는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어느 날 반만 붉은 단풍잎이 우주의 고요함을 깨고 시냇물 위에 내려앉는다. 아직 푸른 시냇물은 시원한 물소리로 흐르고 작게 굽이치는 여울에 소박한 그물 하나 쳐 있다. 너른 바위 위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사내의 눈에 담긴 높고 푸른 하늘...
이 순간 어디선가에서 '억량'이 달려와 대금소리를 얹어줄지 모르겠다. '억량'은17세기 초 신응구 집에서 음악 노비였다. 1603년 월사 이정구에게 삼각산 중흥사 승려이자 공문의 벗, 성민이 "단풍이 절정에 들었으니 시들기 전 한번 다녀가시오"라는 편지를 보냈고 그것을 받아든 이정구의 마음은 일렁거렸다. 그리고는 삼각산을 찾아가기로 생각한 이정구는 신응구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그리고 특별히 신응구에게는 적노 억량을 대동하도록 했던 것.
그 당시 그의 음악이 좋아 찾는 이가 많았다던 억량은 다른 곳에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일정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먼저 길을 떠난 이정구, 신응구 등이 있는 가을 산으로 들어가 그들의 단풍나들이에 대금소리를 풍경처럼 더해줬다고 한다.
여름이 떠나가고 가을이 온갖 모습으로 찾아드는 이 계절, 단풍이 반만 붉은 이 계절, 시냇물 가에 앉아 우주의 시간을 감상하며 시조 한수와 억량의 대금소리 한 자락 얹어본다면 얼마나 살맛 날 것인가?
주위에 너저분하게 놓인 잡동사니만큼이나 나를 둘러싼 복잡한 생각들 잠시 잊고 이 가을 속으로 먼저 가 맞아보면 좋겠다. 아, 가끔 산을 찾았을 때 산길을 가던 분들 중 트로트 음악을 크게 틀어 길동무처럼 다니던 분들이 있었다. 그 음악도 좋으려니와 산길 가장자리, 시냇물 가장자리에서 우주가 흘러가는 시간 속을 거닐 듯 시조 '단풍은 반만 붉고'를 들으며 사무한신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지... 길 가던 억량이 단풍나들이에 동행이 되어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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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하 광주국악방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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