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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그 넓고 깊은 숲(44) 풍년가

탈곡기를 타고…

2017년 11월 10일(금) 00:00
며칠 전 담양 창평의 어느 고즈넉한 한옥에서 명인명창 분들을 모시고 진행된 1박 2일의 행사가 마무리 되었다. 행사를 위해 몇 번 찾아갔을 때도 이런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마루에 걸터앉아 햇살만을 마주하고만 싶었지만 일을 앞둔 처지라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 없어 급히 일을 마무리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행사를 마치고 나니 그 곳의 여유가 다시 찾아들었다. 얼마나 평화로운지, 그리고 매콤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조차 어찌 그리 싱그럽던지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일로 광주로 내려와 지내면서 이곳저곳 남도의 땅을 밟으며 드는 생각이기도 했다. 비옥한 땅에 너른 들, 조금만 가면 있는 푸른 바다, 그리고 아름다운 산세를 보며 드는 생각이 '나중에 이런 곳에 터를 잡고 살고 싶다'다.

이 땅의 풍요 덕분인지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창평 길가에 서 있는 장인들의 간판을 보고 그 중 한 곳을 찾아가 장과 쌀엿, 그리고 약과를 모두 맛보았다. 장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내다본 창밖 저 건너에 내 기억보다는 조금은 현대적 탈곡기가 놓여있었다. 요즘은 찾아보긴 힘든 탈곡기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지금이야 도시개발로 경기도 안산도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한 여섯일곱 살 무렵 경기도 안산은 시골이었고 그곳에 고모님이 사셨는데 집 문밖에 못처럼 생긴 것이 박혀있는 나무통의 탈곡기가 있었다.

어린시절 고모님 댁을 찾을 때면 마을 밖 저 멀리에서 버스가 엄마와 나를 내려주었고 나는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시골길을 지나며 나무 냄새와 흙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공동묘지를 지날 때면 엄마 옆에 꼭 붙어 걸으며 엄마 치마 뒤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걸어가다 저 멀리 어느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이제 거의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바로 그 기억이 내게는 시골에 대한 추억의 전부이다. 바로 그 당시 대문밖에 놓인 탈곡기 앞에서 어린 나는 몇 줌의 볏단을(아니 가닥을) 손에 움켜쥐고서는 탈곡기를 그 볏단으로 훑었었다. 그리고는 이내 멈춰있던 탈곡기가 다시 탈탈거리며 돌아갈까 무서워 볏단을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던 어린 나의 모습을 창평 어느 댁에서 만나게 되었다.

탈곡기를 타고 1970년대 안산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만 같았다. 장인의 집을 나와 논길을 지나며 그렇게 고향의 풍경을 안겨주었던 안산도 변했고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나의 시간들이 창평의 가을 하늘에 구름처럼 떠가는 것 같다. 어느 새 논의 벼들은 정미소에서 쌀로 환골탈태를 하고 있을테지….

이 너른 들에 울렸으면 좋을 노래를 혼자 불러본다. 굿거리 장단이 마음을 두드리고 입에서는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으로 풍년이 왔네…" 남도의 땅에서 화창한 느낌을 주는 경기민요 '풍년가'를 불러본다.

우리 전통음악이 모두 근대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만 같겠지만 1960년대도 신민요라고 분류하는 민요들이 만들어졌다. 이 '풍년가'도 1920년대 경기도 광주 선소리패인 '구자하'의 작품이라 하기도 한다. 후렴 부분에는 "지화자 좋다 얼씨구 졸구 좋다 명년"이라는 가사에 이어 "춘삼월의 화류놀이", "하사월(夏四月)의 관등놀이", "오뉴월의 탁족놀이", "구시월의 단풍놀이", "동지섣달에 설경놀이" 등의 가사가 있다. '이 가사들은 사시사철의 풍속을 담고 있어 풍년가를 '사철가' 또는 '사절가'로 부르기도 하는데 풍류의 여유가 노래 속에 담겨있어 삶도 풍요롭게 느껴진다. 선소리패들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원을 위해 이런 가사를 넣었겠지,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고 싶었을지도…. 노래 가사가 그대로 삶으로 이어지기를 올해도 풍년, 내년에도 풍년, 연년연년이 풍년이로구나를 나도 불러본다.
/김은하 광주국악방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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