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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논산 계백장군묘와 견훤왕릉

계백의 최후와 함께 백제는 신라에 패하고…
계백,삼국사기 '열전' 기록된 백제 인물 중 한 명
지렁이 아들 탄생설화, 견훤을 영웅으로 만들어

2017년 11월 24일(금) 00:00
논산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은 규모도 상당하고 아이들 체험거리도 많은 곳이다.
계백장군 묘.



계백장군묘 옆에 자리한 백제군사박물관.



역사체험학습으로 논산을 갑니다.

논산? 역사체험학습이라면 경주나 부여, 공주 등 옛 도읍의 흔적이 있는 곳이나, 아니면 수원화성이나 독립기념관처럼 입으로 전해진 힘이 느껴지든가 그도 아니라면 지방 중심도시로서 국립박물관이라도 있어야 꺼리가 있을법 한데요. 논산을 가자니 "논산엔 뭐가 있지?"라는 물음부터 보냅니다.

논산엔 뭐가 있을까요? 먼저 '논산'이란 지명부터 보겠습니다.

논산(論山). 의논하다 할 때의 논(論)에 뫼 산(山), 의논하는 산? 광주를 '빛고을'이라는 한글이름으로 풀어 말하는 것처럼 논산은 한글로 풀어 '놀뫼'라는 말을 씁니다.

'놀뫼'는 '노란산'이라는 말입니다. 한자어 지명은 소리만 있고 우리글이 없었을 때 불려진 것을 한자로 바꾸다보니 현재의 훈음으로는 애매한 경우도 보입니다. 놀뫼의 논산이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놀뫼의 노란산을 한자로 바꿔 보니 황산(黃山)이 되고, 황산하면 영화로도 알려진 '황산벌'이 떠오릅니다. 맨처음 우리말에서 한자로 다시 한글로 또다시 한자로 너무 많이 돌아왔습니다.

황산벌 논산엔 계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제가 망하고, 한참후 백제의 한을 끄집어내며 '후백제'란 국호를 썼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후백제의 왕 견훤의 무덤이 바로 여기 논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논산엔 다른 꺼리도 많습니다만 오늘은 계백과 견훤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논산엔 백제군사박물관이라는 시설이 있습니다. 백제군사박물관은 계백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자리 옆에 위치합니다. 규모도 상당하고 아이들 체험꺼리도 많은 곳입니다.

군사박물관 설립의 근거가 된 계백장군의 무덤이 주 동선이 되어야 하는데, 주차장에서 내리면 동선은 박물관으로 연결되어 있어 박물관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정보없이 찾는 사람들은 박물관만 보고 돌아서기도 합니다. 저는 계백장군의 묘부터 보고 군사박물관을 돌아봅니다. 그게 역사체험의 주목적과도 부합되고 기본 예의라고 생각되니까요.

곁길로 돌아 소나무 숲 언덕길을 오르면 '백제계백장군지묘'라는 돌비석과 함께 커다란 봉분이 보입니다. 계백장군의 무덤입니다.

계백은 장군입니다. 사실 장군은 전쟁에서 이겨야하고, 이긴 장군을 우린 기억합니다.

이순신이 영웅이고, 을지문덕, 양만춘, 강감찬, 등 전쟁에서 이긴 장수들이 위인인 것입니다. 아니 패전을 했다고 해도 그로 말미암아 적의 예봉이 꺾인 그런 장수를 영웅시합니다.

그런데 계백은 전혀 기록이 없이 느닷없이 백제가 멸망할 때의 마지막 패전 기록만 있고, 그런데도 유명합니다. '한국을 빛낸 위인들'이라는 노래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국가에서 표준영정으로 그려진 얼굴도 있는 인물입니다.

신라중심 사관으로 썼다는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인물은 50명 정도 되는데 대부분은 신라 인물들이고, 백제 인물중 기록된 3명중 한명이 바로 계백입니다.

최후의 싸움에 나섰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삼국시대 말기 당나라와 신라군이 밀려올 때 마지막 5천 병력의 백제군 장수, 싸움에 나설 때 처자식을 죽이고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다는 계백장군. 그런 용맹한 장수가 있었는데도 마지막 패주인 의자왕을 더 낮게 보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계백의 최후는 계백 자신의 최후이기도 하지만, 백제의 최후이기도 합니다. 678년 백제역사의 마침표가 바로 여기에서 찍어집니다.

논산의 견훤왕릉을 가면서 참가한 일행들에게 물어보면 이전에 이곳을 와 보았다는 이는 없습니다. 그것은 관광버스 기사도 마찬가지인지라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찾아갑니다.

논산시내에서 15분 정도. 시골마을 길을 지나쳐서 어느 교회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화장실도 갖춰진 논산에선 나름 역사관광지로 마련된 곳임에도 언제나 그렇듯 방문객은 우리 뿐입니다. 견훤이 한국사회에서 자리매김 되는 정도이겠지요. 주차장 옆으로 언덕길이 나있고, 한글 반 한자 반의 안내판이 보입니다.

견훤왕릉(甄萱王陵). '甄'은 견으로도 읽히고, 진으로도 읽힙니다. 그래서 견훤이 아니고 진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견훤은 죽은 해는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생년은 모릅니다. 전해지는 후백제의 활동으로 보아 그의 탄생을 867년으로 산정해서 말합니다. 경북 상주 출생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장수가 되어 중앙의 명을 받아 무주(광주)로 파견되어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이라고 전해지는데 일정 세력을 형성한 농민이라고 해도 지방에서 그것도 후백제와는 떨어진 지역이었으니 견훤이 세를 형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을 것 같지는 않고,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견훤의 탄생설화에서 그의 세력 형성의 힌트를 얻어봅니다.

어느 부자집에 딸이 있었는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의 방에 와서 동침하고 새벽이 되면 사라졌다. 딸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아버지는 딸에게 밤에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남자의 옷에 몰래 실을 꿰어 둔 바늘을 꽂아두라고 당부했고, 날이 밝자 실을 따라가 보았는데,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이후 딸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견훤이었다.

결혼을 통한 결합. 어쩌면 백제의 한을 넘어서 더 멀리 마한의 울분까지도 갖고 있는 사람이 용맹한 장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설움을 달래려는게 아니었을까요?

지방으로 파견된 20대 청년이 지역연고가 아닌 곳에서 세를 규합하려면 그 밑바탕이 있어야겠지요. 혼인을 통한 세의 확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인연중에 가장 질긴게 혈연이며,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이 아니면 억지로라도 만들어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결혼이구요. 동시대를 활약한 왕건 또한 부인이 29명이었으며 그 많은 부인을 둔 것은 호족연합체를 구축하려는 방편이었다고 전해지니 당시 견훤이 활약하던 시절은 결혼을 통한 세의 확장이 유행이었나 봅니다.

계백장군의 묘도 그러하고, 견훤왕릉도 실은 원래 여기인지는 확실히 모르고 전해 내려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종합하건데 아마도 여기지 않을까 하며 1960년대 이후 확정한 곳들입니다. 좀 허무하지요. 그래도 나름 고증을 거치고, 믿을만한 기관에서 확정한 것이니 그들의 무덤을 보면서 그들이 만든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만은 합니다.

660년 계백의 최후와 함께 백제는 신라에게 패했고, 백제 땅의 사람들은 어느 날 신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50년 지나고 그 땅에 후백제가 세워집니다. 희미해졌을지라도 후대로 전해진 250년의 설움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그 후백제는 다시 고려에게 패합니다. 백제 땅의 사람들처럼 같은 자리 후백제 땅의 사람들은 다시 다른 지배세력을 맞아야 했을 것입니다.

고려의 수장인 왕건은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차령산맥 이남의 사람은 쓰지 말아라."

고려가 500년을 갑니다.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는 어떠했을까요?

오늘은 상상력을 많이 발휘했습니다. 하나만 기록되어 있는 곳에서 둘, 셋을 찾아내려면 역사여행은 일정부분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우리민족만이 최고라느니, 황당무계 수준만 아니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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