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21일 밤 10시. 이틀 전 임명장을 받은 임창열 신임 경제부총리는 늦은 시간임에도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회견에서 "IMF에 유동성 조절자금 지원을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IMF의 시련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가졌던 총 보유 외환보유액은 39억달러에 불과했다, 임 부총리는 회견 직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당시 20여일 전만 해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던 정부는 이미 1주일 전 내부적으로 IMF행을 결정했던 것이다. 당시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외환위기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IMF의 긴축 재정, 고금리, 구조조정 요구로 당시 30대 그룹 중 절반가량이 사라졌다. 대규모 실업사태가 이어지는 등 국민 개개인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우리 경제의 모든 지형을 뿌리째 흔들었고 부정적으로 바꿔버렸다.

외부적 펀더멘털은 안정화

그 외환 위기를 겪은 지 올해로 만 20년이 됐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최근 국민 인식조사 결과라는 것을 발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지난 50년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IMF 외환위기'를 지목했다. 외환위기가 자신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도 60%나 됐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시간이 지났지만 IMF의 충격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현재 우리 경제의 거시 지표들은 양호한 편이다. 위기의 직접 원인이 됐던 외화 보유액은 10월 말 현재 3,845억 달러로 불어났다. 1997년 말 376이던 코스피 지수는 2,500선을 넘어섰다. 경상수지는 당시 102억 달러 적자였지만 올해는 1~9월에만 933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경제주체인 가계·기업·정부가 일치단결해 위기를 극복해 낸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거시지표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경제는 여전히 각종 변수에 매우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안보위기는 상시 변수이고, 조선·철강 등 주력산업은 여전히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의 재정 부담도 부담스럽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다.

무엇보다 우리경제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기업 규모간 임금, 지역 간 경제력 격차 등 내적인 요소들이 그대로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직원간 평균 소득은 오히려 벌어져 지난해 월평균 소득이 배 이상 격차가 난다. 산업별 월평균 소득 차이도 엄청나다. 지난해 소득이 가장 높은 업종인 금융 및 보험업 대 숙박 및 음식점업간 두 직종 격차는 무려 4배이상이다.

지역별 경제력 편차는 이젠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잡을 태세다. 수도권과 지방, 영남과 호남, 그리고 같은 행정구역 내에서의 소득수준 격차 등이 줄기는커녕 벌어지고 있다. 경제발전의 에너지와 역동성이 떨어져 국토 균형발전 전해는 물론 지방 피폐, 국가경쟁력 약화로까지 이어질 우려가 상존해 있다.

청년들의 일자리가 마뜩치 않은 점은 심각성을 더한다. 취업 시장에 뛰어드는 청년층이 마땅히 갈 자리가 없는데다 수년동안 지속되는 고용한파 영향까지 겹치면서 이같은 구조적 변화가 고착화되고, 빨라지고 있는 추세다. 청년층 고용상황이 나아지려면 청년 일자리가 공급돼야 하는데 해법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

지역·임금격차 등 불안 상존

기업 규모별, 지역별, 산업별, 연령별 임금 격차가 크다면 위화감이나 상실감이 커져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리고 2차 후유증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이다. 이를 해소해 나가지 않으면 국가적 위기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제금융 신청 20년이 지난 현재 외부적인 경제의 펀더멘털이 공고해 보이더라도 이같은 내부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경제가 언제든 다시 나락에 떨어 질 수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