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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그 넓고 깊은 숲 (47) 밑도드리

거문고와 김영랑

2017년 12월 01일(금) 00:00
가을을 지나 겨울 색이 거리 곳곳에서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집을 나설 때 햇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쌩한 바람과 길가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까지… 벌써 두 해째를 맞이하는 광주다. 많은 것에서 풍족할 때 몰랐던 빈 자리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그래서 이 퀭한 바람이 가슴 속에서 회오리치며 더 큰 황폐함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요즘, 어떤 분의 한 마디에 '아차!' 했다.

어렸을 때 긴 계단에 서기만 하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옆 친구와 계단을 먼저 오르기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친구가 먼저 올라갈 때도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마치 윷놀이의 일명 '빽 도' 같이 한 계단 다시 되돌아 내려가기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것 또한 저 계단 끝까지 오르는데 많이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 높은 계단이 더 높아 보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살아온 내 전체 인생보다 이곳에서 맨몸으로 부딪히는 일들에서 옮길 수 없는 바위를 마주한 것 같아 그 '빽 도' 같은 실망감과 힘겨움이 나를 짓누를 요즘이다.

그 분과 대화중 광주에서의 느낀 감정을 토로했다. "정말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바위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럼 마음을 동하게 하면 되겠네요."

그렇다. 마음을 동하게 하기까지 어렵지만 해답은 이미 있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움직일 것을 둘러싼 것의 공통적인 키워드로 '꾸준함, 익숙함, 지속적 등등'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사실 나도 이런 것과 가깝게 지내는 편이라 다시 회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악기를 앞에 두고 조금이라도 완숙해 지기 위해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 한번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한 음 한 음을 반복하고 한 곡을 반복하고 전체를 다시 하고… 그러다가도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바로 연습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바로 알아채 버리게 하는 연습의 시간 그리고 노력의 시간…

그런 연습 속에서도 우리 선생님은 매일매일 빼놓지 말고 '밑도드리'를 타야 한다고 하셨다. 쉽게 보이지만 그 안에 기본이 다 들어있다는 말씀과 함께…

'밑도드리'는 거문고 독주곡으로도 많이 연주되는 곡으로 원래는 '도드리'라 불렸는데 이 곡을 한 옥타브 올려 연주하는 '웃도드리'가 생기면서 '밑도드리'라는 이름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드리'라는 말은 음악시간에 한번쯤 마주했을 그 '되돌이표' 또는 '도돌이표'와 같은 의미이다.(악보에 이 표가 있으면 다시 되돌아가서 일정한 부분을 반복하게 되는 것)

우리나라 악곡 '도드리' 또한 '보허자'라는 곡의 특징인 '환입'(還入) 부분을 따로 떼어 변형해 연주하는 곡을 우리말로 풀어 붙인 이름이다.

이 곡의 느낌은 마치 사람이 적당한 보폭에 보통 걸음걸이의 속도로 걸어가는 것 같은 음악속도를 가지고 있어 편안하다. 그리고 기교가 많기 보다는 소탈하고 솔직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음악이 주는 교훈과 사람사이의 교훈은 비슷한 것 같다. 그분과의 대화에서 한순간에 완전히 텅빈 마음이 꽉 찰 수는 없겠지만 꾸준함으로 다시 되돌아보면 바뀔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호남을 대표하는 시인 김영랑의 '거문고'라는 시가 생각난다.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잠시 뒤로 하고 내게는 시인이 어떻게 이렇게 악기의 속성과 악기를 타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까 궁금함과 놀라움을 안겨준다.

'검은 벽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디 내 기린은 영영 울지도 못한다…'로 시작하는 이 시를 다시 읽어보며 내게서 멀어져 잊혀진 채 '밑도드리'의 흔적은 찾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서있을 나의 거문고를 그려본다. 그리고 마음을 거문고 소리로 채워본다.
/김은하 광주국악방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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