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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전주 객사

조선시대 관찰사 파견된 곳 위용 전하는 '객사'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풍패지관' 현판 걸려

2017년 12월 21일(목) 17:16
전주 객사엔 가로 4미터, 높이 1미터 80에 육박하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한자어 현판이 걸려 있다.








전주에서는 도시 이미지를 홍보할 때 '한바탕 전주'라는 브랜드를 사용한다.










양옥과 한옥, 양복과 한복, 양과와 한과, 양의사와 한의사.

집이었고, 옷이었고, 과자였고, 그냥 의사였는데,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던 때 새로 들어온 것들 이름 앞에 '양(洋)'을 붙여 우리 것과 구분을 했겠지요. 그러다가 점차 서양 것이 일상화 되고, 지금은 오히려 우리 것 앞에 '한(韓)'을 붙여 구분지어 말합니다. 처음엔 서양 것이 낯설었을 것인데, 이제는 한복 입은 사람은 독특한 사람, 한과는 명절 때만 먹는 이벤트 과자,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고 한의사는 특별한 치료를 위한 의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양'에 밀려버린 우리의 '한'. 그 한을 상징코드로 잡고 있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전주로, 전주에서는 도시 이미지를 홍보할 때 '한바탕 전주'라는 브랜드를 사용합니다.

'한바탕'의 '한'은 몇 가지로 해석되는데, 숫자 한 개에서의 한, '크다'라는 의미로서의 한, 그리고 우리의 상징인 '한(韓)'의 의미도 품었습니다.

오늘은 '한'바탕- 전주'를 찾아갑니다.



전주는 전주와 나주에서 한 글자씩 따와 이름 지어진 전라도의 대표 도시였습니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구역이 크게 팔도로 나뉘는데 지방관으로서는 최고의 높은 관직이 관찰사입니다. 그 관찰사가 파견된 곳이 바로 전주이지요. 관찰사의 근무지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객사가 남아 있어 그 위용을 대신합니다.

전주 객사.

한자를 쓰지 않으면 '객사'라는 두 글자만 갖고서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됩니다. 객사에서의 객(客)은 손님이고, 사(舍)는 집이니, 손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관청 안에 있는 손님의 집.

조선시대 객사는 조선의 행정조직인 부, 목, 군, 현, 그리고 수영, 병영의 관아 안에 있었습니다. 낙안읍성, 고창읍성, 나주읍성 등 '○○읍성' 이라고 하는 곳에는 모두 객사가 있었지요. 그 유명한 여수의 진남관이나 통영의 세병관도 객사 건물입니다.

조선시대 객사의 주 기능은 공무를 갖고 출장하는 관리들이 묵어가는 관급 호텔이었으며, 전주는 전라도의 중심이었으니 5성급 호텔쯤으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객사가 호텔 기능 외에 더 큰기능이 있었으니 바로 왕권을 상징했습니다. 객사의 모양은 가운데 중앙 건물을 두고 양쪽에 새의 날개처럼 두 개의 건물을 덧붙였습니다.

가운데 건물엔 대궐 할 때의 '궐(闕)' 자와 전하 할 때의 '전(殿)'자를 모셔두고, 임금이 저기에 있는 듯 생각했고, 양쪽 날개 건물에서 출장 온 관리들이 쉬어 갔지요.

맨 처음 부임지에 도착한 지방관은 객사에 도착해 인사를 하고, 한 달에 두 번(보름과 그믐) 객사에 모셔진 전, 궐 패에 예를 올렸습니다. 객사는 살아있는 임금의 사당이고, 임금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지요.

각 지방 객사마다 정해진 이름이 따로 있어서, 무슨무슨 관 하는 식으로 각 고을의 특성을 살리는 이름을 지어 객사 중앙에 걸어 두었습니다. 전주 객사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한자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전주를 에워싸는 전주성의 남문이 풍남문이고, 서문은 패서문으로 여기에도 풍과 패라는 글자가 들어갑니다.

전주가 즐겨쓰는 '풍'과 '패'를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 한(漢)나라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소설 초한지나 장기판의 초나라 한나라는 우리에겐 익숙한 이름이지요. 역사에선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싸워 유방이 승리하여 중국을 제패합니다. 그 한나라는 중국문화의 기틀이 닦인 시기입니다.

우리가 쓰는 중국글자가 한문이고, 중국민족을 한족이라 부릅니다. 그만큼 중국인에게 있어 '한(漢)'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중국 풍현 패읍 출신입니다. 풍과 패를 합쳐 풍패라 이름하고, 중국의 기틀인 한나라가 풍패에서 나왔듯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전주 이씨이니 전주는 중국 한나라의 풍패같은 곳이다 라는 의미로 전주도 풍패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객사 현판은 가로 4미터에, 높이가 거의 1미터 80에 육박합니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현판의 글씨는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라는 사람이 직접 쓴 글씨로 역사여행 스토리가 더해집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명나라 황태손이 태어났음을 알리러 온 사신 일행의 대표입니다. 그가 왔을 때 조선의 임금 선조가 직접 교외에 나가서 영접했다고 합니다. 물론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에 대한 은혜가 깊었기에 그러했을 수도 있지만, 임금이 직접 나가서 사신을 영접했다는 것은 주지번이 나름 직급도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주지번은 벼슬에 들기 전 청년시절에 조선 선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조선선비는 익산 출신의 표옹 송영구라고 하는데요. 송영구는 1593년 임진왜란 중 정철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간적이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숙박지에서 묵고 있는데, 허드렛일 하는 젊은이가 꽤 어려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연을 물으니 남쪽지방에서 과거를 보러왔다가 돈이 다 떨어져 일하면서 공부한다고. 총기있어 보여 답안지 쓰는 요령을 일러주고, 측은해 보여 용돈도 쥐어주며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지금 공무원 시험은 영어를 비롯한 우리말 국어와 한국사, 무슨 법들의 규칙 암기시험이지만, 조선시대엔 중국 고전과 역사를 머릿속에 달달 꿰차고 있어야 교양인이고 벼슬길에 들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자나 한문 원리는 중국인보다 조선의 선비가 더 잘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지금도 실용 영어 문법책은 외국어로 접한 일본인이나 우리가 원어민보다 더 잘 씁니다. 네이티브들이 습관처럼 하는 말들을 규칙을 적용해 이해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핵심 포인트를 조선 선비는 원어민 중국 청년에게 일러 주었을 것입니다.

어렵던 시절 조선 선비의 도움을 받았던 주지번은 과거에 합격했고 명나라 사신이 되어 조선을 찾았고, 도움을 줬던 선비가 퇴직해 고향에 있음을 확인하고 익산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내려오는 중 전주객사에 들려 기념으로 남긴 글씨가 바로 전주객사에 걸려있는 '풍패지관'입니다.

정말로 주지번이 와서 쓴 것인가는 아직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만 글씨는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이 쓴 것은 확실합니다. 사실은 주지번이 사신으로 머문 기간이 10일 간이라고 하니 익산까지 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나, 사람 입에서 입으로 더해지면서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 것이겠지요.

어쨌든 전주객사의 현판 규모도 놀랍지만 그 현판 글씨 속에 들어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답사의 맛이 살아납니다.

답사는 세 개의 간(間)을 꿰어 맞춰야 완성이 됩니다. 공간에서 시간을 넘어서는 인간의 이야기로요.









/체험학습 동행(historytour.co.k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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