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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양도성 4대문

서대문에서 '의'를, 남대문에서 '예'를
4대문 방위 이름에 '인의예지' 사용

2018년 01월 04일(목) 16:57
한양을 찾는 사람들은 수십 날을 걷고 유숙하며 숭례문에 다달았다. 숭례문은 한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긴장감을 주었을 것이다. 반드시 숭례문을 통과해야 한양으로 들어설 수 있었으므로 문 위 커다란 \'숭례문\' 현판 이름을 읽고 정신을 한번쯤 가다듬기도 했을 것이다.
동요 '퐁당퐁당' 음에 맞춰 제가 개사한 노래가 있습니다.

일삼구이 조선 이성계 / 조상 종묘, 농사 사직단 / 경-복궁 창덕 창경 경희궁 경운궁 / 유교 인의예지신 4대문 건설 /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이 노래는 조선의 건국이나 궁궐 주제여행을 떠나는 서울행 버스에서 함께 부르며, 노랫말을 익히게 합니다.

조선의 건국 해인 1392년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 조선의 왕들의 위패를 모셨던 종묘, 국가의 경제를 상징하는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던 사직단, 그리고 조선의 5대 궁궐과 4대문, 더불어 4대문 이름 속에 녹아 있는 조선 국정 지표인 유교 정신까지를 노랫말에 집어넣었지요. 오늘은 이 노래 속 이야기 중 조선 한양의 4대문을 찾아가겠습니다.



처음 숭례문을 찾아갔을 때입니다. 서울 용산에서 택시를 타고 "숭례문이요." 라고 말했더니, 기사가 "숭례문요?" 뒤끝을 올리며 되묻습니다.

순간 서울에 올라온 촌놈은 당황스럽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 남대문요." 라고 기사가 스스로 정리합니다. 기사에겐 숭례문 보다는 남대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었나 봅니다.

숭례문? 남대문?

왜 이름이 두 개일까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왕조 조선을 연 세력들은 새 궁궐터로 경복궁 자리를 정합니다. 궁을 기준으로 좌우에 각각 종묘와 사직을 두고, 궁궐과 종묘 사직 등 도심을 감싸는 담을 두르고, 동서남북에 4대문을 세웁니다.

4대문은 그 방위에 따라 이름을 붙이면 작명도 편하거니와 사람들에게 인지시키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의 방위로 된 이름 말고도, 4대문의 이름에 새왕조의 국정지표를 집어넣습니다. 하나의 문에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의 시작입니다. 방위의 이름과 가치의 이름 중, 사람들에겐 방위의 이름이 더 편했을지라도, 신도시 기획자는 4대문의 현판에 가치의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조선은 유교국가를 표방했습니다. 유교는 중국의 혼란시기인 춘추전국시기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지어 놓고 실천하게 하여 더 행복한 세상을 구현하려는 목표를 갖고 출발하였습니다.

유교의 출발인 공자 당시 혼란기엔 인기가 없었지만, 이후 중국의 통일왕조에선 국가 정책으로 받아들이고, 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과목으로 교양인의 필수과목으로 유교가 생활 속으로 들어옵니다. 유교소양은 사회질서요, 도덕규범이었던 것입니다. 한자문화권인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 중 유교국가인 조선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유교에선 행복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인간 본연의 선한 마음이 단초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네 가지로 규정해 4단으로 개념화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 어질고, 옳고, 예의바르고, 지혜를 상징하는 것들이지요. 이 네 가지가 외부로 표출되어 나타날 때 어떤 작용을 하는가로 주리론이네, 주기론이네 하는 정치학문으로 편가르기를 하고, 4단과 7정과의 관계에 대해 광주 출신 젊은 선비 기대승이 퇴계 이황과 논쟁을 벌였다는 것은 우리 지역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이야기꺼리가 됩니다.

이 인의예지(仁義禮智) 4단이 한양 도성의 네 개의 대문 이름에 사용됩니다.

인(仁)은 동대문에 '인을 흥하게 하라'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걸려있고, 의(義)는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에 '의를 돈독히 하라'는 돈의문(敦義門)이라는 이름으로, 예(禮)는 '예를 숭상하라'는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이름으로 남대문에서 만날 수 있으며, 마지막 지혜를 상징하는 지(智)는 북쪽 대문에 숙지문이 되어야 할 터인데 약간 변형된 이름으로 숙정문(肅靖門)으로 전해집니다.

숙지문이라 하지 않고 왜 숙정문이라고 했을까에 관해선 식자들마다 이런 저런 설들을 말하는데, 저는 완전하게 들어맞는 것은 살아 있지 않았다고 여겼을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서 기인했다고 봅니다. 태극의 원리도 음양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고, 유교소양중 하나인 주역 또한 변화를 말하는 학문이었거든요.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 동대문인 흥인지문은 왜 네글자일까? 도읍지 한양 동쪽 기운을 살리려 '갈 지(之)'를 넣었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쳤을 숭례문에는 그만큼이나 꺼리가 많습니다.

먼저 세로 쓰기의 현판입니다. 마주하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고려였다고 합니다. 그 덕인지는 몰라도 조선 초에 지어진 숭례문은 임진왜란도 일제강점기도 한국전쟁에도 살아남은 600년 된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에 들어 불에 타고 맙니다. 2008년 지금으로 부터 10년 전이네요.

당시 글씨 그대로 남아 있는 현판 이름은 누가 썼을까? 숭례문의 글씨는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부터 시작해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누가 썼다라고 명확하게 전해지진 않습니다.

그리고 숭례문이 우리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국보 1호이기 때문입니다. 흥인지문인 동대문은 보물 1호 이구요. 이 일련번호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붙여진 것이라 하여 일제 잔재로 언급될 때 자주 회자되는 내용입니다. 실은 남대문도 동대문도 일제강점기 도시 구획정리 기획자들에 의해 헐릴 위기에서 반대자들 설득으로 남게 됩니다. 설득했던 근거가 일제 강점기 침략자들 조상인 임진왜란 일본 선봉군이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진격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두 대문이 남겨진 이유이지, 국보 보물 지정과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숭례문은 빌딩 숲속에 갇혀있고, 자동차들에게 길을 내주고 있지만, 현대문명에 기죽지 않고 서 있습니다. 조선 건국부터 600여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갖고 이 대문을 통과했을까요?

광주에서 출발한 저는 기차를 타고 다시 택시로 단 반나절 만에 숭례문을 찾았지만, 한양을 찾는 삼남의 사람들은 수십 날을 걷고 유숙하며 숭례문에 다달았을 것입니다. 숭례문은 한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긴장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반드시 숭례문을 통과해야 한양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과객은 칼 찬 숭례문 위병의 검사를 통과해야 한양 진입이 허가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의 진입 말고도 문 위 커다란 '숭례문' 현판 이름을 읽고, 정신을 한번쯤 가다듬기도 했을 것입니다. 숭례문의 '예'에 대해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재작년부터 초·중·고생들에게 인성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인성의 8가지 덕목으로 '예·효·정직·책임·존중·배려·소통·협동'을 정해 놓고서 주제별 수업을 하더군요.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인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만든 인성 항목의 첫 번째 역시 숭례문의 '예'와 동일합니다.

저 또한 숭례문을 지나치며 '예'가 무얼까를 생각해 봅니다. '예'는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나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고, 상대는 보여지는 '예'를 봄으로서 '예'를 표하는 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나의 '예'를 보고 상대 또한 '예'로써 답을 하겠지요. 너도 나도 '예'를 표하게 되면 세상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역사여행 '숭례문'에서 바람을 가져 봅니다.

/체험학습 동행 (historytour.co.k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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