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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매혹

이 연 수 문화미디어부장

2018년 01월 23일(화) 18:12
15년만에 이사를 감행하며 가차없이 묵은 살림들을 정리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몇 날 며칠을 버려도 버릴 것은 어찌 그리 많던지.

이사 후에도 버리는 일은 얼마간 계속됐다. 산더미같이 책을 버리고, 옷을 버리고, 가구를, 안쓰는 가전제품을, 장난감을, 먼지 낀 운동기구를, 유통기한이 몇 년씩 지난 인스턴트 식품을….

그 많은 것들을 어쩌면 그리 무심히 쌓아두고 지냈을까. 그렇게 버리고 나니 살림이 '슬림'해졌다. 이제 다시는 쓸데없는 것들을 사지도, 모으지도 않으리라.

대대적인 비움 작업 중에도 버릴 수 없었던 게 두 가지 있다. 손편지와 LP판이다. 턴테이블이 망가진 20년 묵은 SONY 오디오는 아낌없이 버렸지만 정작 버릴 수 없었던 건 100여장이 넘는 희귀 LP판이다. 턴테이블이 없으니 들을 방법이 없는데도….



LP판과 손편지



자켓만 봐도 행복해지는 LP판 한 장 한 장에는 내 젊은 날이 다 들어 있다. 희귀 LP판 한 장을 구하기 위해 밤잠을 설쳤고, 구하고 나서는 음악을 듣느라 잠못 들었던 시간들. 자켓에 그려진 그림, 가수들 사진만으로도 시간은 벌써 되돌아가고 있다.

끼니를 거르고 싶으면 한 두끼 쯤 거르고 드러누워 있어도, 삼국지 전집을 보느라 방학 내내 방구석에 처박혀 두문불출해도 밥 차려달라, 뭐 챙겨달라 불러대는 부양가족이 없던 시절이다.

마음껏 음악 듣고, 마음껏 춤추고 웃고 떠드는 게 지금 생각해보니 기막힌 특권이던 시절. 여행이 필요할 땐 떠나고, 휴가가 필요할 땐 돈 모을 궁리만 하면 됐다. 고백하고 싶으면 고백하고, 화내고 싶을 땐 화 냈다. 나 자신 외엔 신경쓸 것이 없었으니까.

그 시절엔 손 편지를 썼다. 문자메시지도 없었고 이메일도 없었던 오직 종이에 펜으로 쓴 편지. 편지 안엔 간혹 네잎 클로버도 들어있고, 사진도 들어있고, 잘 그린 그림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백지 편지도 있었다.

친구, 이성, 가족들, 선생님에게서 받은 편지, 그리고 내 아이가 글을 쓸 줄 알면서부터는 어버이날, 생일날 꼬박꼬박 받았던 사랑스러운 아이들 편지까지…. 이 두 가지만큼은 버릴 수 없어 LP판은 책꽃이에, 편지들은 상자에 넣어두었다.

새삼 아날로그의 매력이 그립다.

순천 출신으로 한국문단의 거장인 조정래 소설가가 얼마 전부터 새 소설 집필작업에 들어갔다. 육필을 고집하는 작가는 외부와 접촉을 일체 끊은 채 길고 긴 집필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작가는 "소설은 문장이 독자를 이끌어 가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밀도감, 흡입력, 탄력이 있어야 한다. 손으로 쓰지 않고 기계로 쓰면 기계의 속도에 의해 문장이 힘을 잃는다. 끈적끈적한 자기 개성이 묻어나는 자기 문장을 쓸 수 있다는 환희 때문에 손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제대로 된 글을 써야지 빨리 쓰면 뭐하냐는 것인데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입장에서 제대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손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또 곽재구 시인과 손광은 시인이 있다. 시인이자 화가인 한희원 작가도 손으로 칼럼 등을 써 보낸다.

한희원 작가는 "컴퓨터 자판에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손으로 쓰지 않으면 글이 잘 안떠오른다"고 했다.



디지털도 감성과 통해야



디지털시대가 생활을 편리하게 바꿔놓고 있지만 아날로그 없는 디지털은 상상할 수가 없다.

최첨단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과 정선휘의 작품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도 디지털 속 아날로그의 감성이 관객의 마음과 통했기 때문이 아닐지.

테니스 세계랭킹 1위 조코비치가 자신을 꺾은 정현선수와 함께 찍힌 사진을 SNS에 올리며 상대의 승리를 축하한 멋진 소식이 경기 직후 순식간에 전 세계에 알려지는 속도를 감히 넘볼 수는 없지만 인간의 감동이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기반이 없이는 속도의 위력도 빛을 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날로그의 매력은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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