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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군산

부잔교·장미갤러리·세관 등 개항과 함께 한 슬픈 역사 오롯이

2018년 02월 22일(목) 18:04
군산세관. 1908년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해 건축했다고 한다.
근대미술관








근대역사박물관 내부








근대역사박물관 내부












군산(群山).

무리 군(郡)에 뫼 산(山)입니다. 산들이 모여 있는 곳. 지역 명칭이 그 곳의 특징을 갖고 이름한다면, 군산은 '산(山)' 보다는 '바다' 이미지가 더 강한데, 항구 도시인 군산이 어떻게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요.

군산 앞바다의 섬을 합쳐 부를 때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라고 합니다. 한자어를 풀어보면 '옛 군산의 여러 섬' 정도 되겠네요. 지금 군산이 있기 전에 옛 군산은 바다에 있는 섬들의 모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엔 예로부터 외침이 많았다고 합니다. 북쪽은 중국 한족을 비롯해 대륙 쪽에서 일어난 여진 거란 몽골들이 수차례 우리땅을 넘봤고, 남쪽으로는 일본으로부터의 침입이 많았습니다. 그 방비책으로 군산 앞바다에 있는 섬에 왜구를 방어하는 진을 설치했고, 섬들이 떨어져 있다보니 왜구들이 큰 집단으로 올 경우 대항이 힘들다고 하여 내륙지역으로 군사 시설을 옮겨옵니다.

섬 도(島)의 한자에서 산(山)이 보이듯 섬의 특징은 산을 품고 있음인데, 여러 섬들이 모인 '군산'은 군사기지의 이전과 함께 내륙으로 그대로 들어와 지역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있던 자리는 고군산이라 부르구요.



군산으로 역사여행을 갑니다. 군산에서 역사여행으로 내세우는 테마는 근대이야기입니다. 근대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 수탈의 현장, 당시 지어진 건물이며 철길과 항구 시설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인근의 건물은 걸어서 둘러볼 정도의 그만 그만한 거리에 있으므로 차를 한 곳에 두고 돌아봐도 됩니다.

제일 먼저 근대역사관을 찾습니다. 군산의 개항과 함께 우리 역사를 알아 볼 수 있도록 최근에 단장된 군산의 근대역사박물관입니다.

박물관을 시작으로 둘러보는 지역이 행정구역상으론 군산시 장미동 일대입니다. 장미. 꽃을 연상하게 되는데, 장미라는 말은 저장하다 할 때 장(藏)과 쌀 미(米)입니다. 지금은 장미갤러리란 이름으로 그 기능을 달리하고 있지만, 이름에서 보듯 쌀을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폐허로 남겨진 기차길은 바닷가까지 이어져 있고, 기차길이 끝나는 땅과 바다가 연결된 곳에는 부잔교라는 유물이 보입니다. 한자 '뜰 부(浮)'자가 들어간 부잔교는 일명 '뜬다리'로 밀물과 썰물 때 높낮이가 달라지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호남의 쌀은 이 부잔교를 건너 일본행 선박에 옮겨지게 됩니다.

옛적 왜구들이 무력으로 쌀을 빼앗아 갔다면 근대의 일본은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쌀을 수탈해 갔습니다. 수탈의 목적을 수행키 위한 세관이며 은행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호남관세전시관이란 이름으로 단장되어진 군산세관.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 건물만이 남아 있습니다. 대한제국 당시 1908년에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되는 은행 건물이 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일본 지방은행으로 조선에서는 1890년 인천에 처음 문을 열었고, 군산은 1907년에 조선에서는 일곱 번째로 지점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군산세관이며 근대미술관 등은 100여년 전의 건물들이라 여행 이벤트적인 색다름으로 기꺼이 인증샷 요건을 충족하지만, 여행객의 들뜬 심사로만 볼 수 없는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 말. 산업혁명으로 원료공급과 상품 판매망을 찾던 서구세력들이 동양으로 찾아옵니다. 말은 무역이지만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운 강압이었지요. 중국도 일본도 서양 세력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또한 구실을 들어 강화도에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고, 미국군도 쳐들어와 피해를 보긴 했지만 어쨌든 무찔렀습니다. 프랑스 침입의 병인양요, 미군침입의 신미양요이지요. 이 때부터 사건과 조약의 연속으로 순서배열하기가 문제로 많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시험 대비용으로 이런 저런 사건 사고들에 헷갈려 하는 것처럼, 당시의 우리땅 사람들 또한 밀려드는 외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태평양 대서양을 누비던 많은 제국주의 세력들이 있었지만, 우린 신생 제국주의로 막 발돋움 하려는 일본과 최초의 조약인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됩니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부산을 시작으로 동해안을 따라 원산, 그리고 서해안에서는 인천에 이어 목포, 군산 등이 개항하게 됩니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우니 경제적인 목적으로, 원산은 청나라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 목적으로, 인천은 서울과 가까우니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목포와 군산은 호남의 곡창지대를 노리는 개항이었습니다. 군산이 1899년이니 일제강점 10년 전이네요. 이후 식민지 시기를 거치는 동안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나간 물자 가운데 95퍼센트가 쌀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왜 그렇게도 우리 쌀을 수탈해 갔을까요?

일본은 우리보다 십여년 먼저 개항합니다. 미국에 의해서요. 그리고 서구 산업혁명처럼 공업화 정책을 폅니다. 공장이 돌아가고, 상품을 생산해 판매할 시장을 찾습니다. 생산 상품이 다른 나라와 경쟁하려면 가격 경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물건 가격이라는게 원재료에 가공하는 인건비가 합산되어 책정됩니다.

우리의 산업화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새로이 산업화 대열에 들어서는 국가가 기존의 다른 국가와 경쟁하려면 그 첫째가 가격입니다. 신생 국가가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은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이지요.

낮은 인건비를 받는 노동자가 기꺼이 생산현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게 하려면 먹고는 살아야 할 것이고, 그 방법이 바로 주식인 낮은 쌀값 안정화에 있습니다. 우리 땅에서 싸게 수탈해간 쌀을 일본에서 싼값에 풀 수 있었고, 이는 일본의 산업발전으로 연계됩니다.

쌀은 공산품처럼 목표를 정했다고 해서 생산되는게 아니라 일년을 기다려야 하고, 또 먹고사는 것의 기본이 되는 것이니 쌀 수탈로 우리의 삶은 더 팍팍해졌겠지요.

군산 일제강점기 건물들의 기능은 지금은 없어졌고,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일본은행 금고에 새겨진 글귀에 눈이 갑니다.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조선백성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다."

1871년 신미양요를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몇 해 전 평양 앞바다에 통상을 요구하며 부도덕한 거래를 행하다 불태워진 제너럴 셔먼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군산엔 제너럴 모터스가 본사에서 폐쇄결정을 예고합니다. 이어 뉴스로 전해지는 그들의 행위와 파생된 수치를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어이없네' 라는 말 밖엔 안나오지만,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움이고 규칙입니다. 돈 놓고 더 많은 돈을 향하는 최대이익을 위한 자본의 움직임은 도덕의 잣대로 선악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앞선 시기는 총칼로 무장한 무력과 함께였다면 자본주의 시대인 지금은 자본의 들고나감으로 앞선 시기의 총칼을 대신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피해는 역시 현장에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민초들의 삶이겠지요.

역사여행을 통해 억지 교훈이라도 가져온다면, 국가의 기능과 위정자들의 판단에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랄까요?







/체험학습 동행(historytour.co.k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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