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추가
닫기
70년 동안 묻혀온 고독과 통한의 침묵

여수지역사회연구소, 관련 자료 전체 인수
시민들의 감정 중시한 외국인 기자의 기록

2020년 01월 14일(화) 16:36
칼 마이던스가 진압군 제2연대 병사들이 주먹밥을 배급받고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
연행 도중 머리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체포자의 모습으로, 미국 라이프지에 실렸던 사진이다.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

오랫동안 묻혀온 ‘여순사건’은 70년 동안 강요된 고독과 통한의 침묵이라 불린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타임-라이프지와 교섭해 칼 마이던스가 촬영한 여순사건 사진 전체를 인수 받아,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을 발간했다.

여순사건은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우리는 제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해 총궐기했다”고 항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국내 각 신문사는 큰 관심을 가지고 특파원을 현지로 급파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서 이를 다뤘다.

특히, 미국 타임-라이프지의 사진기자였던 칼 마이던스는 여순사건 당시 그 현장을 카메라로 생생히 기록했다. 그가 촬영한 사진은 중복을 제외하고 310여 장으로, 국내 신문에 보도된 사진보다 4배 이상 많은 양이었다. 또, 여순사건의 실상을 알려주는 측면에서도 칼 마이던스 사진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칼 마이던스는 1936년에 라이프지에 입사해 여러 전쟁터를 찾아 현장을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 등의 전장에 파견돼 세계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시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근무하던 당시 미국 타임-라이프지 지사는 도쿄에 있었다. 도쿄국장으로 근무한 그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시기에 한국에 입구해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이 사진집은 진압군이 점령한 순천과 여수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한다.

칼 마이던스가 순천과 여수에 도착했을 때는 전 시민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협력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모이지 않으면 봉기군으로 간주된다는 말에 모든 시민들은 운동장으로 모였으며,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한 발자국도 움직이자 못했다.

운동장에는 수도 없이 많은 시체들이 있었으며, 시민들은 먼발치에서 통곡만 할 뿐이었다.

칼 마이던스는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운동장을 지키는 군인들의 기관총구, 군인과 경찰이 가혹하게 협력자를 심문하는 장면, 가족을 염려하며 멀리서 지켜보는 아낙네들, 집합한 수많은 인파와 좌우로 구별되는 사람들, 운동장 구석에서 사살된 시신 등 여순사건에서 얼마나 많은 경찰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여순사건 현장에 외국인 사진기자로 참가했던 칼 마이던스는 진압군의 이동과 함께 움직인다. 때문에 작전회의와 군부대 이동, 직접 전투장면 등을 담은 사진, 장갑차 등 기계화된 국군의 위용 등 진압군의 활동을 담은 사진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칼 마이던스는 일반 시민들의 움직임과 감정을 중요시했다.

한편, 그가 취재한 글과 사진은 라이프지 11월 15일자에 게재됐으나 국내 신문은 봉기군을 인간으로 보지 않은 진압군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에 혐의자 색출 과정을 자세히 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 마이던스는 협력자 색출 과정을 자세히 취재하면서 폭력의 힘을 절감했다. 진압군의 폭력에 질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시민들은 자기 가족의 시체를 조심스레 찾아내고는 통곡 속의 광란에 빠지는가 하면, 자신의 목숨이 걸린 순간에도 한마디의 항변도 하지 못한 채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 칼 마이던스가 목격한 시민들의 깊은 절망과 무기력은 수십 년간 여순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칼 마이던스는 사진을 ‘역사의 증인’으로 생각해 찰나의 시간을 포착했다. 그렇게 촬영한 310여 장의 사진 중 중요 사건을 엄선해 주제별로 배치한 이번 사진집은 여순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보람 기자         이보람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실시간뉴스

많이 본뉴스

자치

전매인터뷰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