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으로 불안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단골로 꾸는 꿈이 있다. 시험 시작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교실을 찾지 못해 쩔쩔매며 뛰어다니는 꿈.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그렇게 두고두고 스트레스로 남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마음의 짐이다. 학창시절에 풀어내야 할 일이 어디 시험뿐이었던가. 친구관계나 진로문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꿈과 희망을 놓고도 선생님들까지를 동원해 함께 고심하곤 했다.

은사님의 조언에 따라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처음엔 배우고 익힌 정답대로 수업하고 평가하면 되리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상황과 맞물려 급변하는 교육현장은 순간순간 당황하게 하는 일이 예고도 없이 일어나곤 한다. 근래에는 다양성과 다름이란 문제가 특히 중요한 화두가 되어 그 안에서 무엇에 대해 단정하고 명제를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학교 안은 다문화사회에 맞게 다국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교수법마저도 열린 시선으로 다각적인 문제들에까지 대처해야 한다.

어느 초등학교 방학과제로 부여된 시험문제를 보고 황당한 기억이 있다. “혼자 집에 있을 때 친척이나 아는 오빠, 이웃 아저씨가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이라는 선택형 문제의 정답은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가 전제되어야 나올 수 있는 답이며, 우리 정서의 예절교육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문제이다. 어떻든 무엇보다 다급한 생활교육이라고도 하고, 여러 끔찍한 사건들을 떠올리다보면 더 좋은 정답도 없다. 다만 교육현장의 어려움이 여실히 들여다보이는 문제인 듯해 안타까울 뿐이다.

공부라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가설 속에서 궁리하고 이해하여 실천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때 교수자보다는 학생의 역할과 입장을 더욱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교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참된 인간으로 기르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새겨보면 더더욱 그렇다.

예전에 아들아이를 안고 인연이 있는 한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스님은 “예쁜 아이를 어떻게 기르실 겁니까?” 하고 물었다. 엉겁결에 “열심히 기르겠습니다.” 했더니 “그것은 옳은 답이 아닙니다. 잘 기른다고 하십시오.”라고 했다. 당시에는 내 대답이 훨씬 겸손한 의지가 담긴 듯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의 생장과 교육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상만물의 이치가 자연스럽게 적용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세월과 함께 깨닫고 나서야 머리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전쟁 직후에 나서 ‘베이비부머’라는 명칭을 안고 어려운 한 시기를 살아온 세대들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은 제 밥그릇 제가 들고 태어난다.”라는 자기합리화적인 어른들의 말에 길들여지면서 ‘절로 절로’ 자라느라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세대에 못지않게 나라의 부흥과 발전에 대들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사람들은 그 큰 원동력을 두고 ‘스스로 자기답게 살아낸 힘’의 결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스로 그렇게[自然] 될 수밖에 없는 까닭[所以然]에 순응하는 것. 다시 말해 ‘절로 절로’의 섭리는 선인들에게 있어서도 참된 인생살이의 정답으로 가는 길목쯤으로 여겼던 듯하다.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自然歌)’만 해도 시대를 불문하고 꾸준히 회자되고 있고, 우암 송시열과 송강 정철 등 작가 논란이 많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 전반에 두루 통용되는 사상으로 공명을 일으켰다는 흔적일 것이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부딪힐 때마다 주문처럼 ‘자연가’를 읊조리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보면 신기하게도 집착과 아집이 서서히 녹아들면서 조금은 유여해지는 나를 만나게 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곤 한다. 흐르는 물과 같이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은 적절한 답이 되어주길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