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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사격 파편에 오랜 투병 간 기능 악화로 결국 숨져

<5·18 기획> 40년 만에 받은 명예 졸업장
<1>고 최은홍 모친 이금순씨
시민군 도우려 금남로서 헌혈 참여
"민주화 운동 못 핀 꽃 졸업장 한풀이"

2020년 05월 18일(월) 19:47
고 최은홍씨의 어머니인 이금순씨(78)가 80년 5월 계엄군의 헬기사격 파편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 2009년 세상을 떠난 아들을 생각함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노모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1980년 계엄군의 헬기사격 파편에 맞아 온 몸이 부서진 고 최은홍씨의 어머니인 이금순씨(78)는 아들만 생각하면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도 못하고 눈물부터 흘렸다.

어머니 이 씨는 “40년 전 아들 은홍이는 계엄군에 저항해 다친 시민군들에게 헌혈하기 위해 금남로로 나갔다”며 “하지만 이틀 뒤 전남대 병원에서 본 은홍이는 한쪽 팔이 잘리고 신체 장기가 모두 터져 나와 있었다”고 흐느끼며 잔혹했던 80년 5월을 회상했다.

이씨의 아들 최은홍씨는 5·18민주화 운동 당시 20살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공과금을 내지 못해 동신중을 중퇴했다. 다행히 현재의 대안학교 기관이었던 ‘성심중학교(당시 인가가 안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검정고시로 조대부고를 1979년 19살에 늦깎이 입학했다. 최씨는 이듬해인 1980년 5월 21일 신군부의 계엄령으로 광주지역 모든 학교가 휴교한 상황에서 집에 머물고 있었다. 최씨는 생계를 책임지고 광주에서 순천까지 일을 다녀야 했던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이 씨는 “아들은 학교 다니면서 음악에 소질이 있어 학교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며 “그날 차라리 순천까지 일을 가지 않았다면 아들의 인생이 그렇게 비참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오히려 자신을 한탄하기도 했다.

이씨는 “은홍이가 계엄군에 짓밟히기 전날인 20일 생계 때문에 순천에 내려왔다가 당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광주-순천 간 버스가 모두 막혔다”며 “다음날 오전 공중전화로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최은홍씨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눈 앞이 깜깜했다. 아무리 차편을 구해봤지만 광주로 통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차단된 상태였다. 간신히 화순까지 가는 버스를 탄 어머니 이씨는 광주로 걸어야 했다. 이씨는 “집에 도착해보니 21일 밤 늦은 시간이었다”며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처음에는 조선대병원에 최은홍씨 시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대병원을 갔다”고 그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나 이씨는 조선대병원에서 아들 은홍씨를 찾을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로부터 ‘양림동 기독병원에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기독병원으로 향하던 중, ‘은홍이가 전대병원 8층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남대병원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전남대병원 복도에 누워 있는 은홍씨의 모습은 처참할 뿐이었다.

이씨는 “이틀 만에 마주친 아들은 복도에 있던 침대에서 온몸에 수술 자국이 있었고, 왼팔은 엄지 손가락만 겨우 남은 상태였다”며 “배속에 있던 창자 등이 모두 밖으로 나와 피가 부족해 수술도 겨우 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 어머니 이씨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씨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던 중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어 자세히 들었더니 ‘도청 인근에서 친구를 보러 가던 중 두꺼운 외벽도 뚫을 수 있는 헬기사격 파편에 의해 온 몸이 찢어졌다’계속 말을 했다”며 “아들의 마지막 될지 몰랐던 그 이야기와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고 강조했다. 이후 7개월 넘게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최은홍씨는 기적처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오랜 투병으로 간 기능은 급격히 악화됐고 신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지난 결국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이씨는 “얼마 전 전두환이 광주법원에서 ‘헬기사격은 없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우리 아들이 그 증거다”면서 “지금이라도 명예졸업장을 받는 게 아들이 제대로 살아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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