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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시간

김향남(수필가·문학박사)

2020년 08월 05일(수) 01:52
바닷가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새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루다가 동트는 것을 보고서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 몇 마리가 풀숲으로 숨어들고, 분꽃이며 나리꽃 핀 꽃밭에선 박각시나방이 긴 부리를 꽂아 꿀을 빨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나도 풍경인 듯 가만히 서있다가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팡팡 불꽃놀이 즐기던 청춘들은 지금쯤 깊은 잠에 들었을 테고, 어둑한 해변엔 파도 소리도 없었다. 바닷물은 멀리 빠져나가 있었고 해변은 길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드러난 바닥은 의외로 단단했다. 바닥은 부드럽고 서늘하게, 단단하고 촉촉하게 내 발바닥과 맞닿았다. 나는 물과 모래와 진흙이 알맞게 섞인 바다의 바닥을 천천히 걸었다.

어제 오후 그의 부음을 들었다. 뜬금없는 소식에 망연자실 허탈해 있다가 물어물어 알게 된 그의 사망 원인은 간암이었다. 아직은 팔팔하게 움직일 나이었지만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던 그는, 그 때문에 더욱 힘들었을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서둘러 가버렸나 보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통증이 지나갔다. 그도 그의 아내도 나와는 유별한 관계였다.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졸업 후에도 부부가 된 두 사람을 중심으로 곧잘 모이곤 했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소식조차 모를 만큼 왕래가 뜸해졌다. 직장이다 뭐다 해서 다들 바쁘기도 했고 부부의 형편도 좋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가끔 근황을 나누며 서로를 다독일 수도 있었을 텐데, 참 후회막심이었다.

그는 선량하고 재기 출중했지만 생활에는 능하지 못했다. 결혼 후 조그만 소품가게를 운영했는데 잘 되지 않았고, 그걸 접고 다른 일을 해봤지만 실패했다. 그의 삶은 좌충우돌 순탄치 못했고 그의 아내 역시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주 고주망태가 되었다. 어찌어찌 집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귀가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던 그녀가 혹시나 하고 문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오래전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바닥에 내쳐진 듯 암울한 절망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가끔 그녀와 만났다. 그녀는 거의 은둔자처럼 살고 있었다. 모든 불요불급한 것들을 털어낸 최소한의 반경에서였다. 생활의 빈곤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굴레라고 해도, 그녀에게서는 단단하고 단정한 아우라가 느껴졌다(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간혹 삶의 그늘 혹은 고통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크게 원망을 늘어놓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한없이 굳세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설핏 도는 눈물 속엔 그녀의 흔들림과 연약함, 슬픔, 분노들이 죄다 들어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삶은 고단하고 외롭지만 그래도 견뎌보는 것…. 어느덧 내핍이 몸에 배었을 뿐 두려움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만난 지도 벌써 3년여가 되어 간다. 그녀는 와병 중인 그를 돌보느라 더욱 힘겨웠을 테고, 생각지 못한 일로 나도 아무 경황이 없었다.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누구를 만나고 싶은 일상의 의욕마저 거세당한 채 멀거니 앉아 있는 때가 부지기수였다. 그렇더라도 시간은 흘러갔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시간도, 나의 시간도 파도처럼 굽이치고 있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나도 바닥의 시간을 살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무도 없는 첫새벽의 바닷가를 혼자서 걷는다. 나는 가는 모래톱 위에 발도장을 찍거나 가볍게 종종거려 본다.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듯 두 팔을 벌려 붉게 젖어오는 하늘을 둥글게 안아보기도 한다.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지만, 떨어진 공도 튀어오를 만큼 단단한 바닥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바닥은 본래 이런 것이라고, 넓고 평평한 것이 바닥이라고. 그래서 바닥은 딛고 일어서기 좋은 곳이라고 바다의 바닥을 밟으면서 새삼 느끼고 있다. 하여 나는 멀리 빠져나간 바닷물이 물굽이를 일으키며 다시 밀려올 때까지 기꺼이 바닥의 시간을 걸어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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