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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글짓기대회 고등부 대상

한라에서 백두까지
최은송(목포 영흥고 2년)

2020년 12월 16일(수) 10:18
최은송(고등부 대상)
“우리 비행기는 중국 연길까지 가는 대한항공 625편입니다.”

승무원의 안내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행기 창가에 앉아 승무원의 음성을 들으며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분명히 연길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이내 비행기가 떠올랐고, 백두가 땀에 젖은 손으로 내 팔을 덥석 잡았다.

“한라야, 나 지금 너무 떨려.”

*

학교 공식 카페 틴틴을 통해 백두를 처음 만났다. 전교생이 틴틴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같은 소셜미디어의 영향인지 실제 회원 수는 2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열 명 남짓의 회원들은 꾸준히 글을 올렸고, 덕분에 카페 현황은 늘 좋았다. 이따금 틴틴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이 서로를 궁금하게 했으나 올라온 게시물은 각자의 솔직하고 담백한 민낯 그 전부였기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다. 틴틴에 올라오는 것들 중 유독 백두의 게시물에는 강한 애정이 갔다. 부드러운 문체 뒤의 강인함. 백두는 어딘가 나와 닮은 듯 했으나 동시에 우리는 서로 달랐다. 나는 백두가 궁금했다.

고2 가을쯤 틴틴은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쁜 입시로 다들 글을 올리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틴틴을 정리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 일부였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미련을 털어버리고자 백두에게 쪽지를 보냈다.

“백두야,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보고 싶어.”

*

백두와 내가 스물 세 살이 되던 해, 우리는 그동안 계획했던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짐은 최대한 가볍게 챙겨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도는 관광의 명소였지만 우리는 별다른 일정 없이 한라산만 방문했다. 백두는 한라산에 도착하자마자 한라의 공기 내음을 크게 들이켰다. 여린 살갗으로 흙의 온기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나는 어떤 전율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산의 풍경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을 제안한 건 백두였다. 우리가 만난 지 세달 쯤 됐을 때 백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언젠가 그곳에 나와 함께 가고 싶고,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백두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자신이 북한 사람이라고 했다.

“엄마는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어. 할머니 고향은 본래 인천이었는데, 6.25전쟁 당시 북한으로 피난을 오셨다가 돌아가시기 전 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하셨어. 살아생전 언니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하셨고. 엄마는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언젠가 할머니가 고향을 느낄 수 있도록 할 거라고 했어.”

백두의 엄마는 예고도 없이 할머니의 유골과 함께 사라졌고, 이년 뒤 브로커를 고용했으니 남한으로 넘어오라는 엄마의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가 탈북한 이후 백두의 집은 배신자의 집안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다고 했다. 중산층이었던 집안은 몰락했고, 아빠는 반역을 저지른 여자의 핏줄이라며 자신을 벌레 보듯 했다고.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돌을 맞고,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았던 백두는 선택의 여지없이 도망치듯 탈북했다고 말했다. 나는 백두와 한라산 백록담 속에 손을 담궜다. 몽실한 구름이 표면에 살짝 비춰 그 풍경이 아름다웠다. 살갗에 닿는 물은 시원하고 개운했다. 우리는 준비해 온 작은 유리병에 백록담의 영혼의 일부를 조심히 옮겨 담았다.

*

백두산 땅을 밟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백두산 천지는 가히 아름다웠으며, 이곳이 북한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은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백두와 나는 백록담의 영혼을 빌려온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천지 앞으로 다가갔다. 한라와 백두가 하나가 되는 경사스러운 순간이었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고, 온 몸이 감동으로 물들고 있었다. 드디어 한라산과 백두산의 물을 합쳤을 때, 한라산과 백두산의 영혼은 함께 뒤섞여 다시는 떼어낼 수 없는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한라와 백두가 진정으로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눈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아무리 용맹한 호랑이도 얼굴과 앞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뒷발과 엉덩이만 있어도 마찬가지다. 헌데 용맹한 호랑이의 형상으로 이어진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해야만 함께할 수 있는 걸까. 왜 서로를 다른 나라로 지칭하고,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걸까. 백두산 천지에서 백두와 나는 함께였지만, 한라와 백두는 여전히 함께하지 못했다.

(원문은 전남매일 홈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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