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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병란의 집'을 개관하며

임택 광주 동구청장

2021년 09월 12일(일) 18:21
임택 광주 동구청장
1980년 5월19일 교단에서 해직된 후 학원 강사로 일하던 문병란 시인은 5·18 수배령을 피해 급히 새벽길을 나선다. 손에는 부인의 결혼반지와 친구가 쥐여준 10만 원이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서울로, 세 명의 딸들은 순천으로, 자신은 여수의 제자 집으로, 빈집은 흰둥이만 지키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 시인은 자택에서 수갑에 묶여 나왔다. 하교하던 까까머리 중학생 아들과 마주친 것은 참 미안할 일이었다.

광주 동구 밤실로 4번안길 16. ‘질 고운 달빛이 그득하고 아직 외상술을 주는 동네’라고 시인이 노래한 곳. 걸어서 5분 거리에 서양화가 오지호의 가옥이 있고, 그곳에서 몇 걸음 더 걸으면 6월의 청년 이한열의 집이 있는 동네. 그 동네의 어디쯤 문병란의 집이 있다. 전국적으로 이름깨나 있던 재야인사들이 번갈아 가며 숙식을 의탁하기도 했던 곳. ‘8번의 이사’ 끝에 정착한 40평 조금 넘는 집. 아들 앞에서 수갑에 묶여 가던 1980년부터 2015년 타계할 때까지 시인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광주 동구가 매입해 ‘시인 문병란의 집’으로 새롭게 단장, 시범 운영을 거쳐 지난 10일 정식 개관했다.

건물 1층에는 자개농이 놓인 ‘시인의 방’과 대표 저서와 연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내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오르면 필사공간, 영상실, 그리고 ‘시인의 서재’가 있다. 서재에는 ‘자본주의 발달사’ 같은 사회과학책부터 시집, 문학잡지, 대중가요 책 등이 다양하다. 5·18 최초 기록서이자 민주화운동의 불덩이였다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펼치면, 위험을 각오하고 책의 제작에 관여한 이의 색바랜 서명을 볼 수 있다.

‘화염병 대신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 시인’(뉴욕타임스)이라는 거창한 칭호 뒤에는 ‘두 눈이 말똥말똥 고와 가는 애들’을 생각하며 ‘사직서에 바르르 떠는 초라한 아버지’(실직기)가 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부끄럽고 괴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꽃처럼 곱게 타오를 수 없는 봄’(5월의 연가)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찾아오는 ‘절망’을 거부하며 ‘몇 그램의 분노’(어느 날 아침)를 자양분 삼아 시대의 불의에 저항한다.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장,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광주·전남 공동대표 등 도무지 그 시대로서는 별 이득은커녕 탄압의 표적만 됐을 수많은 감투는 그가 수시로 찾아오는 절망에 꺾이지 않고 행동했던 ‘몇 안 되는 움직이는 운동가’였다는 징표이다.

그러나 그가 ‘우렁차고 뜨거운 가슴’으로만 노래한 것은 아니다. ‘비판하면서도 미학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산골 개울물’과 같은 ‘맑은 서정’도 지니고 있다. 앞집의 목련화를 보고는 ‘남의 꽃으로 봄을 맞았다’(봄 나들이)며 미안해하기도 하고 ‘꿈꾸는 자’에게 ‘고행길 멈추지 마라’고 위로(희망가)하며, ‘시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시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라 노래한다.

‘시인 문병란의 집’에는 책 외에도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여러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에는 앳된 얼굴의 이선희와 조용필이 있다. 시인이 선물 받은 그림과 글씨, 교수 시절의 월급명세서와 시험 채점표는 소소한 그 시절의 흔적을 보여 준다.

이곳은 책을 좋아하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종일 뒹굴거리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도중에 허기가 지면 근처 지산유원지의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다시 와 책을 읽거나 시를 쓰면 그만이다.

동구는 하나둘 소리 없이 헐리고 사라지는 인문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철거될 뻔한 동명동 근대가옥을 ‘인문학당’으로 보전하는 일, 도시개발로 사라져 가는 삶의 흔적과 근·현대 동구의 인물을 발굴해 기록하는 일, 그리고 ‘시인 문병란의 집’을 조성하는 일까지 모두 그러한 의지의 결과이다.

동구는 이곳을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으로, 시민들이 끊임없이 함께 소통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꾸밀 생각이다. 많은 분이 이곳을 찾아 위로와 희망을 가져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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