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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투사 아닌 광주 시민으로…5월정신 잊어선 안돼”

■정현애 바른역사 시민연대 대표
신혼집 책방서 민주운동 거점
계엄군 무차별진압 피로 얼룩
10년간 두드러기 등 트라우마
성폭행·발포 명령자 규명·색출

2024년 05월 15일(수) 19:23
녹두서점 안주인 정현애 바른역사 시민연대 대표
5·18민주화운동 44주기다. ‘모두의 오월, 하나되는 오월’을 바라보는 올해는 이후 45주년, 50주년을 준비하는 토대를 마련하면서 청소년과 청년 등 미래세대에게 5·18을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오월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를 담아 오월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80년 5월 현장을 지켰던 이들로부터 당시의 광주 상황을 다시 한번 들어보고 그들이 말하는 미래세대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당부를 지면에 싣는다./편집자주



“녹두서점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토론장이자 도피하는 운동가들의 안식처였었죠.”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당시 녹두서점을 마지막까지 지켜냈던 정현애 바른역사시민연대 대표는 서점이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쉼터였다고 회상했다.

정 대표와 녹두서점과의 인연은 1978년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 권유로 처음 방문해 지금 남편인 김상윤씨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서점의 사장이던 김씨는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하고 1977년 녹두서점을 열었다. 당시 광주에서 역사와 사회의식에 대한 서적 등 유일하게 금서를 취급했던 녹두서점에는 운동가들이 새로운 책을 찾기 위해 모여들었고 신혼방이던 단칸방은 자연스레 민주화 열망을 품은 사람들의 토론장이 됐다. 이들에게 5·18 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시작됐다.

정 대표는 “17일 늦은 밤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남편이 예비검속으로 보안대에 붙잡혀 갔다”며 “다음 날 오전 책방에는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시민들의 부인과 운동가들이 모였고, 전남대 정문에서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정보를 취합하는 상황실이 됐다”고 설명했다.

5월 18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길거리는 시민들의 피로 붉게 얼룩졌다. 정 대표가 있던 책방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시 계엄군은 성별·나이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고 쓰러진 시민들은 트럭에 쓰레기 버리듯 던져졌다”며 “이때 책방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게 셔터를 내렸다가도 도망치는 시민들을 목격하게 되면 빠르게 셔터를 올려 숨겨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함께 책방에서 활동하던 윤상원 열사와 정 대표는 광주에서 발생하는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했다. 투사회보는 계엄군 장교와 친분이 있던 전남대 김상형 교수가 전달한 군부대 동향과 계속해서 적어온 상황일지를 근거로 신속하고 정확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창구가 됐고, 시민들을 규합하는 역할을 했다.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가 이뤄지면서 책방 문을 닫고 피신하기로 결정했지만, 정 대표는 다시 돌아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광주 시민들의 대피소와 상황실 역할을 했던 곳을 내버려 둔 채 대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앞선 것이다.

그는 “탱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각자 피신하기로 하고 친정으로 향하던 중 나주에서 총으로 무장한 시민군들이 트럭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봤다”며 “민주투사라는 생각보다는 광주의 한 시민으로서 시민들의 희생을 그저 바라만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려 책방을 다시 열었다”고 말했다.

책방이 다시 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다시 서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후 수습대책위가 꾸려졌고 책방에서 일을 처리하기에는 공간이 좁아 YWCA로 거점을 옮겼다. 여성대표로 대책위에 참여한 정 대표는 이곳에서도 사망한 시민을 위한 애도를 위해 검은 리본을 만들고 궐기대회를 진행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27일 새벽 계엄군이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YWCA에 있던 시민들은 전부 해산했다. 정 대표도 책방으로 돌아갔지만, 들이닥친 계엄군에 의해 결국 체포됐다.

정 대표는 상무대와 505보안부대 등 여러 곳으로 끌려다니며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그는 “수감당하는 동안은 구타와 잠을 안 재우며 조서를 쓰게 하는 등 고문당하는 나날이 반복됐다”며 “곳곳에서 들렸던 시민들이 울부짖던 끔찍한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정 대표의 3개월이 넘는 수감생활은 김상윤씨가 조작된 조서에 지장을 찍으면 가족들을 풀어주겠다는 계엄군의 거래를 받아들이면서 끝났다. 그는 “사건이 마무리된 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당시 생각에 열이 나고 몸에 두드러기가 나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였다”며 “5·18민중항쟁이 4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당시 발포명령자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부분 등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위해선 5월의 광주를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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