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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시 이야기-개나리 울타리
2024년 06월 20일(목) 18:55
아이클릭아트
개나리 울타리



김기택



개나리 가지들이 하늘에다 낙서하고 있다

심심해 미쳐버릴 것 같은 아이의 스케치북처럼

찢어지도록 거칠게 선을 그어

낙서로 구름 위에 깽판을 치고 있다

하늘이 지저분해지도록

늦겨울 흑백풍경을 박박 그어 지우고 있다



작년 봄에 전지가위가 가지런히 잘라줬는데

잘린 자리가 엉킨 전깃줄처럼 또 헝클어져 있다



시린 바람에 날아가던 검은 비닐봉지가

낙서에 걸려 종일 파닥거리고 있다

낙엽이 담배꽁초, 종이컵, 과자 봉지를 몰고 다니다

낙서 밑으로 모여 바스락거린다

쓰레기를 지우려다 낙서가 더 칙칙해지고 있다



중략 -



시집 ‘낫이라는 칼’ 문학과 지성사, 문학과 지성 시인선 573





시 ‘개나리 울타리’에서 시인은 시적 대상인 개나리 가지들이 담장 가득 뻗어가는 모습을 “낙서”와 “선들”로 보고 서사를 구축했다.

“늦겨울 흑백풍경을 박박 그어 지우고 있다”는 에둘러 말하기로 ‘봄이 오고 있다’는 의미를 은닉하고 있어서 독자가 음미하는데 새뜻한 즐거움을 준다. 시에서 은닉, 상징, 함축, 은유, 대유법 등 여러 시적 수사법은 시의 특성인 모호성과 다층적 의미를 주기도 하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시 문장은 1연에서 백미라고 생각한다.

3연 “시린 바람에 날아가던 검은 비닐봉지가 /낙서에 걸려 종일 파닥거리고 있다”는 담장위의 개나리 덤불에 비닐봉지가 걸려있는 흔한 풍경을 “검은 비닐봉지가 낙서에 걸려”로 표현했다. 이렇듯 정갈하지 못한 거리의 풍경도 시인의 시선에 닿으면 미적 정경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진달래 꽃망울을 지나가던 바람”에서 이른 봄바람이 그 꽃망울에 닿으며 지나온 촉각적 묘사 속에서 여리고 부드러운 감각이 피부에 애틋하게 전해져온다.

“목련 꽃봉오리를 터뜨리던 희디흰 향기가 /낙서를 피해 가려다 걸려 /녹슨 철조망 같은 얼기설기 가지 위에다 /노랑노랑 꽃망울을 피우고 있다”는 개나리 가지들에 꽃이 만개한 모습이다. 이 연에는 시각 후각 촉각적 이미지들이 어우러져서 꽃이 만개한 봄을 더욱 생동감 있게 느끼게 한다.

때로 거칠어진 마음도 시를 읽으므로 타인과 사물들에 대해 이른 봄꽃 같은 결로 대할 수 있는 힘이 생기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시인·전남매일 신춘문예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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