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능한 사림시대의 개척자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13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화담 서경덕(1489~1546)의 아래에서 학문을 익혔다. 명종 8년(1553), 31세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료로서 첫발을 디뎠다. 이때부터 통산 37년을 조정 관료로 몸담았는데 이 중 재상의 자리에 있던 기간은 14년이며, 이 중 조정의 영수인 영의정의 반열에 올랐던 기간은 6년에 이른다.
박순은 언론기관 역할을 담당한 3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중 사간원과 사헌부의 수장을 역임할 당시의 활동이 주목된다. 그는 전횡을 일삼던 윤원형(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동생)을 축출하고 외척정치를 청산했다.
이어 명종 사후 선조가 등극하자 박순은 이조판서를 맡아 포은 정몽주의 학맥을 이은 사림파의 등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좌의정으로 봉직하던 선조 9년(1576년)에는 율곡 이이를 천거했으며, 영의정이었던 선조 16년(1583년)에는 김여물, 최경회 등을 천거했다. 이이는 성리학을 통한 사회체제 전면개혁을 꿈꿨으며, 김여물과 최경회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절했다. 이처럼 박순이 천거한 인물들 대다수는 국가를 이끌어가던 동량이었던 셈이다.
그는 벼슬이나 재물에 욕심 또한 없었다. 젊은시절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벼슬을 양보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또한 정승을 무려 14년이나 역임하면서도 그의 집에는 줄서있는 사람은 없었으며 녹봉은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품성으로 그는 청백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선조는 박순을 ‘松筠節操水月精神(소나무나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이나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이라 극찬했다.
그는 관료로서의 명망 뿐만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시(詩)에 능하여 한 시대의 종주(宗主)’라고 불렸다. 이러한 명성을 지는 사암은 절경의 쌍계루에도 고풍스런 한시를 남겼다.

奇題白巖雙溪樓 次圃隱先生板上韻(백암사 쌍계루에 시를 지어보내다. 포은(정몽주)선생의 판상 위의 시에 차운하다.)

아름답게 중수하여 스님 누웠는데
두 신선*의 시문을 누가 이을 수 있으랴
산중의 방초(향기로운 풀)는 푸른 봄이 저물어가고
풍광 속 나그네 시름에 백발만 더하네
죽림의 차 솥 곁 담소는 오래전 끊겼지만
금빛 시내 돌 침상의 꿈은 여전히 맑구나
기봉의 동쪽 가 안개 노을 자욱한 길을
서글프다 덧없는 삶 몇 번이나 오르려나

*여기서 두 신선은 기문인 쌍계루기(雙溪樓記)를 지은 목은 이색과 쌍계루 최초의 제영시인 기제쌍계루(奇題雙溪樓)를 남긴 포은 정몽주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박순은 쌍계루에 남긴 시에서 중수되어 이어져 내려온 쌍계루의 아름다움을 부각함과 동시에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를 신선에 비유하며 쌍계루에 남긴 두 사람의 기문과 한시를 격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산수를 자유롭게 거닐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실현되기는 어렵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백암산 쌍계루의 박순의 제영시를 바라보며 그의 자연을 동경하는 마음과 청백리 정신, 그리고 곧은 선비의 기개를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본다.
/내장산국립공원백암사무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