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흰 꽃 내 가슴 가득 타오르는구나!”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질렀다. 이두는 그렇게 그날 밤 이른 초저녁에 설화에게 바로 허물어져 버렸다. 격정을 치르고 깊은 잠에 빠진 이두를 홀로 남겨두고 슬그머니 묘막을 빠져 나온 설화는 이두의 이름 위에 먹물을 잔뜩 묻힌 붓으로 가위표를 그었다.
‘흐흥! 결국은 저자에게 시묘살이는 괴로움이었고 가식이었던 거였네….’
설화는 달빛 아래서 씁쓸한 미소를 흘겼다.
다음은 이 고을에서 시문이 뛰어나고 문장이 가장 으뜸이라고 소문이 난 허문이었다. 허문에게 시제를 주면 그 자리에서 술 서너 잔을 연이어 마시고는 붓을 뽑아 10여 수를 단번에 써낼 만큼 신기에 가까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옛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살아 돌아온 것일까. 잘생긴 용모에 호방한 성품에다 거침없는 그의 문장은 마치 노호하며 먼 바다를 향해 굽이쳐 흘러가는 영산강 물굽이처럼 언제나 시원했던 것이다. 여름에는 서늘한 폭포수마냥 겨울에는 차가운 얼음장마냥 뭇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설화는 그 대문장가라는 허문과 한번 시문을 겨루어가며 진탕 어울려 놀고 싶어졌다.
어느 화창한 오후 설화는 시골 아낙처럼 머리를 하얀 천으로 묶어 감싸고 소박한 옷차림새를 하고는 옆에 바구니를 끼고 마치 산나물 캐는 소녀처럼 단장하고는 허문이 시묘살이를 하고 있다는 산자락을 향해 출발했다.
봄꽃이 진 자리에 푸른 잎들이 돋아나 너울너울 자라고 농부들은 마지막 모내기에 바빴다. 못줄을 떼고 못자리에서 지게로 짊어온 모를 황소를 달아 써레질을 해 반듯하게 고른 온 논에 고루 뿌려 열댓 명씩 줄줄이 서서 모를 심었다. 어린 아이들은 무논에 들어가 모를 가져다 나르느라 바빴다. 설화는 분주히 모내기 하는 농부들을 바라보며 들길을 걸어 산자락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산 벚꽃이 새하얗게 날렸던 산 너울에는 초록이 한창 몰려들고 있었다. 그 사이 먼 남녘나라에서 날아온 여름새들은 짝을 만나 새끼 칠 둥지를 짓느라 먹이를 사냥하랴 바빴다.
즐겁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설화는 사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제법 움푹하게 둥지를 튼 양지바른 둔덕에 새로 쓴 묘 앞에 세워진 허름한 묘막을 발견했다. 바로 허문이 부친상을 당하고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쪽 양지녘을 눈여겨 보며 설화는 허리를 구부리고 산나물을 캐는 듯 두리번거리며 그쪽으로 향해 갔다.
좁은 산길을 헤쳐 가자 바로 허문이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잘 단장해 심은 잔디가 새파랗게 자라고 있는 바로 양지녘 묘막 앞이었다.
설화는 버젓이 그곳 잔디밭으로 나가 한손에 조그마한 칼을 쥐어들고 산나물을 찾는 듯 웅크리고 앉았다.
“허허! 푸른 바람 오는 남녘에서 꽃소식 한데 몰려왔다 갔는데 지난가을 찬 서리에 슬픔만 가득한 내 마음 아직 꽃 한 송이도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 가는 늦봄 앞에 뉘 서러움인가 눈부신 흰 꽃 내 가슴 가득 타오르는구나!”
문득 사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나는가 싶어 설화가 뒤돌아보니 허름한 묘막 문을 열고 나온 누런 상복을 걸쳐 입은 허문이 설화를 바라보며 시를 한수 읊조리는 것이었다.
“봄바람 불면 천지에 피는 것이 꽃이요 푸른 향기거늘 아직도 꽃 못 본 마음 그 뉘 마음이뇨 꽃 다 져버린 푸른 잔디에 앉아 포르릉!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새 이 마음 잡아둘 이 천지에 아직 없네.”
설화는 속으로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생뚱맞게 돌아앉아 시 한수로 얼른 맞받아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