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날 이후 낭자를 잊지 못했소”


왕이 내려준 효자상을 받고 그 고을에서 효자랍시고 위세깨나 떨치고 살던 이두의 눈에 옷감을 사려고 비단전 머리에서 기웃 거리던 설화가 언뜻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두는 친한 벗을 만나 술을 마시며 즐기려고 그 산골 장에까지 나들이를 왔던 참이었다. 이두는 아름다운 설화의 자태를 보고 한눈에 알아보고는 어렴풋이 예전 시묘살이 때의 일을 기억했던 것이다.
‘오호! 그때 그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이두는 즉시 같이 따라온 젊은 종자에게 설화의 뒤를 밟게 했다. 젊은 종자는 옷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설화의 뒤를 밟아 사는 곳을 알아내고는 돌아가 그 즉시 이두에게 알렸다.
“이곳에서 삼십 리 밖에 있는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으음! 그 그래! 알았노라!”
이두는 아름다운 설화를 만나 기필코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불쑥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것이었다.
임돌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가고 막 태기가 있는 설화는 기쁜 마음으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어느 날 정오 무렵이었다. 한 마리 횐 말이 말발굽을 요란하게 울리며 산골짜기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외부의 사람이 전혀 오지 않는 이 깊은 산골짜기에 난데없이 무슨 말 발굽 소리일까? 불길한 예감이 든 설화는 부엌에서 나와 가을이 시작된 평화로운 산골짜기를 멀리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 사람 하나가 새하얀 말을 몰고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추수를 해서 내년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 양식도 두둑이 장만해 두고, 배냇저고리며 아기 이불도 마련해야지 생각하며 마음이 들뜬 설화였다.
임돌은 다가올 겨울을 지낼 땔나무를 열심히 하러 나다니는 중이었다. 임돌과 설화는 그렇게 기쁨에 들떠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워! 워!”
쏜살같이 달려오던 하얀 말이 설화의 집 마당에 떡 멈춰 섰다. 설화는 말을 탄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건장한 몸의 이두였던 것이다. “낭자! 나를 모르겠소?”
이두는 말에서 훌쩍 뛰어 내리며 말했다.
“이 효자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이 깊은 산중까지 오셨지요?”
설화는 싸늘하게 말했다.
“난 그날 이후 낭자를 잊지 못했소. 시묘살이가 끝난 후 백방으로 낭자를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하였소. 낭자! 나를 따라 이 산골을 당장 떠납시다. 내 호강시켜 드리리다.”
이두가 말했다.
“비록 그땐 왕명을 받아 기생으로 내 그리했지만 이젠 새 사람이 되었소. 돌아가시오! 더구나 나는 이제 한 사내의 어엿한 아내이니 낭자라는 말도 당치않소!”
설화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낭자! 그땐 우린 한 몸이었소. 비록 내 부인이 있다 하나 멀리 두고 그대를 호강시키며 보겠소. 난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대부호가 아니오.”
그렇게 말하며 이두는 설화에게로 다가갔다. 순간 설화는 품에 지니고 있던 날카로운 은장도를 뽑아 손에 치켜들었다.
“흥! 대부호도, 천하가 다 아는 관리라도, 왕이라도 나는 싫소! 가까이 오면 찌르겠소!”
설화는 은장도를 제 푸른 핏줄 펄떡펄떡 살아 맥동치는 목 깨를 겨누었다. 은장도의 서슬 퍼런 칼날이 햇빛에 날카롭게 반짝였다.
“주제에 무슨 절개요! 나는 낭자를 하루도 잊지 못했소. 나와 함께 한 세상 편안하게 살면서 부귀영화를 맘껏 누립시다. 낭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