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시인/진도군청근무


농부사시가

         이종호

곡식이 실해
장사꾼들이 ‘팔란가?’함시로
성가시게 찾아 들어오면
한해 농사 큰 걱정거리 없이
잘된 심이다

〈여명〉
새벽잠 깬 구름은 아직 쌀쌀한 바람에 추웠는지
햇님 좇아 새색시처럼 얼굴 붉힌다

〈봄〉
겨우내 차두 주둥이 옴싹 묶였다 끈타불 풀린
씬나락은 빨간 고무 물통에 몸 푹 담그니
벌써부터 움나 싹틀려고 웅성거린다
금슬 좋은 제비부부는 처마 밑으로
헌 볏짚 낀 무른 흙 물어날러
예쁜 신방을 짹짹 꾸미고 있다
이종 늦었는가 보리대 까맣게 태우고
트랙터로 쟁기질한 논은 방죽물 허빡 마시고
쎄레질 반반하게 여러 번 해주니까
보리쌀 미숫가루 한 양판 퍼서 샘물 붓고
젓어 놓은 양 먹음직스럽다

〈여름〉
한 발 두 발 기어가는 이앙기는 까만 직사각틀 초록 모판 줄줄 삼키며
미끈한 논바닥을 여덟 고랑씩 양껏 잡고
애기 모를 푸푸 뱉어 척척 줄 맞춰 심겨 대니
서있는 앳띤 모습이 중학교 입학식 운동장 풍경 같다
지금은 전교생 고작 칠십 명 남짓한 작은 촌 학교지만
한때 천 오백여 명 학생들이 푸른색 교복 입고
앞으로 나란히, 일동~ 차렷!한 부동자세다
아침 저녁 어김없이 두 번 세수하는 금싸라기 갯벌에서
꼬막, 낙지, 해우 벌이하던 총각들한테
푼돈 보상금 몇 푼 안겨주고
육지로 마구 내몰아버린
긴긴 뻘뚝이 마파람에 더 야속하다

〈가을〉
부챗살 가운데 옴팍 갈라진 은행나무는 고약한 향기 풍기며
치렁한 연노랑색 원피스 갈아입고 잘빠진 다리 내비치니
고야리 들녘도 그저 들떠 덩달아 황금빛 물결 출렁거린다
벌써 콤바인은 이앙기 지나갔던 길을 따라서
누럭 나락을 줄줄 훑어 먹고 배 터지게 부르면
논가에 서있는 트럭 맞춤 곳간으로 달려가 주욱 토해낸다
토실토실한 나락들은 방앗간으로 살갗 깎으러 가니
논두렁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억새풀은 귀뚜라미 소리에
더 울적한지 흰 머리털 풀풀 날린다

〈겨울〉
허기진 철새들은 논바닥에 띄엄띄엄 누워있는
덜 훑어 떨어진 이삭을 아쉬운대로 주워 먹으러 날아든다
감나무 이파리도 거의 다 떨어진 꼭대기엔
따다만 홍시는 늙디 늙어 까맣게 쭈그러진다
북풍 찬바람 세차게 밀려오니
피래진 논은 볏짚을 끌어댕겨 덮어도
덜덜 떨다 지쳐가는데
포근한 눈들이 흰 이불 밤새 덮어줘 곤히 잠든다
끝 모를 흰 세상도 아침 한나절 햇볕 슬그머니 비추니
논밭두렁은 무거운 솜이불 걷어차고
진도대파도 가랑지에 묻은 눈을 탈탈 털어내며
개운하게 파란 어깨 쭉지를 쭈욱 편다

〈낙조〉
아직 낯이 얼얼한 해는 잠이 밀려오는지
서쪽 끝도 못 가서
벌써 섬과 섬사이로 풍덩 빠져 잘도 잔다

널뛰기하는 대파값도 통통하게 잘 받아야
자식들 하나라도 제대로 가르칠 텐데
‘살란가?’ 할까봐 시름 깊어간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렷다
모든 근심, 걱정 물러가라 이랴~~


불혹(不惑)의 나이에 아부지를 갑자기 여의고 불효했던 지난 날을 뉘우치며 사부곡「외양간」을 작시하여 노래로 만들어 부르면서 7년째 하늘 구름을 수시로 보게 되었죠. 어느 날 바람의 흐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봉황새 구름(?)을 운좋게 보고 구릿빛 얼굴의 아부지를 떠올렸죠. 70~80년대 지게·쟁기질하시며 육남매를 키우셨던 농사꾼 아부지의 이야기‘농부사시가’를 그려보고 싶었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아름다운 진도의 여명과 낙조로 스케치하고 그 속에 사계(四季)를 듬뿍 담아본 제 대표시라고 할 수 있죠. 저 역시 언젠가 이슬처럼 사라질까봐, 미리 아빠의 흔적들을 애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줄려고 서둘러 346편의 시를 썼는지 모르겠어요

이종호(李宗浩)
전남 진도 출생, 아호는 아흥(我?)
1994년~ 현재 진도군청 근무
시집 『여루사탕』, 『알껍다구』, 『진도추천』, 『무당거미』 등
음반 『외양간』, 『어느여름 여루사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