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출신 박선욱 시인이 25년 만에 네 번째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를 출간했다. 그동안 동화 작가 및 전기 작가로 활동했던 박 시인이 25년 동안 꾸준히 써 온 100편의 시 중 62편을 엄선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1985년 첫 시집 '그때 이후'로 등단해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등의 시집을 냈던 박 시인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출간했지만, 그럴수록 시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강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유고 시집이 되기 전 발표한다"고 우스갯소리를 전한 그는 "해묵은 노트를 들여다보다 덮곤 했던 일들을 비로소 마무리짓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출간 소감을 밝혔다.

'회색빛 베어지다'는 개인과 역사를 넘나들고 서정과 서사를 교차시키면서 가능한 모든 세계를 아우르기 위해 힘쓴다. 세상 만물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사랑, 불의나 폭력적 상황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의지가 시편마다 깊숙이 배어있다.

특히, 국가적 폭력이 자행된 곳의 참상을 강력하게 규탄하기도 하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곡질한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며, 인간의 폭력에 속수무책인 자연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았다.

이러한 점은 시집의 제목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일산 호수공원에서 마주한 수양버들나무의 가녀린 잎들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희망이 색이라는 박 시인은 작은 촛불이 적폐를 밀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불러낸 것과 같은 선상이라고 설명했다. 회색빛은 민중의 꿈을 압살하는 세력으로 그 무리가 베어짐을 통해 악의 세력을 물리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 또한 2부에 수록된 '이 살가운 봄날에' 중 '5월은 사랑이다'라는 구절이었다. 광주 5·18민주화운동 당시 임동에 살았던 박 시인은 친구같이 느껴진 시민군에게 밥과 빵, 옷 등을 사주곤 했다.

박 시인은 "대동 세상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봤다"며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5월 정신이 깃든 시를 쓰면서 잊지 않겠다"고 전했다. 이어 "인간성 말살 세력을 고발하고 비판, 항거하는 정신이 깃든 시를 쓰며 작고 연약한 것들에 관심을 갖겠다"고 강조했다.

박 시인의 이러한 모습은 80년대부터 이어져 왔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지난 1983년 3월 상경해 출판사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그는 광주실천문학 매체에 최초로 5·18을 주제로 한 작품을 실어 광주의 문제를 알리기도 한 민중 시인이다.

이렇게 36여 년간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청년 시절 친구들의 거침없는 "이것도 시냐?" 발언 덕이다. 진실 되지만 상처였던 그 말은 반성을 이끌어 왔다.

"그 말은 제 평생을 이끌어 온 말이에요. 친구들의 말 덕분에 이 시대를 말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된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잊지 않을 수 있었어요."

11살 때 숙제로 써갔던 '시계'라는 시로 칭찬을 받은 뒤 시에 관심을 가졌던 박 시인은 유신정권 시절 핵심을 파고드는 문병란 시인의 날 선 언어의 시와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 등을 보며 시대의 어둠을 향해 던지는 목소리를 배웠다고 전했다.

그 영향으로 출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사회 을들의 소중함을 알리는 동화 등을 써오며 민중에 뿌리를 둔 초심을 잃지 않았다.

광주전남작가회의 박관서 회장은 "25년 만에 나온 시집이라 함부로 읽기가 힘들다"며 "시가 가져가야 하는 음률을 놓치지 않아 예술 매개로 주제에 접근하는 풍성한 맛이 느껴진다"고 시집을 접한 소감을 전했다.

b판시선. 151쪽.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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