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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간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만들다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상과 현실 속 상상력

2019년 05월 08일(수) 15:47
[ 전남매일=광주 ] 이보람 기자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가정하고 지원자를 모집해 18개월 동안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보려 했던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를 담은 ‘유토피아 실험’이 출간됐다.

영국 대학교수인 저자 딜런 에번스는 현대 기술 없이도 수 천 년을 살았던 마야인들처럼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어보려고 했으나 자기 파멸이라는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이 책은 유토피아 실험의 시작부터 종말, 그 이후를 다룬 논픽션이다.

저자는 지구는 얼마나 더 뜨거워지고, 식량은 정의롭게 분배될 수 있는지, 자본주의 체제는 탐욕과 부패로 종말에 이르는지, AI는 인간을 소외시켜 기계 문명의 새 장을 열 것 인가에 대한 물음을 ‘자연과 문명, 더 나아가 우리 인류는 지속 가능한가’로 연결시킨다.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잘못돼가고 있는 무언가를 바로잡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실험과 시도들을 계속해나간다.

이를테면 “순간에 모든 것들이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면? 그래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과 사회적 안전장치가 사라져버린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어쩌다 운이 좋아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등 너무 앞서나간 상상처럼 들리는 가상의 현실 같은 것이다.

이상향의 축소판을 만들어보겠다는 저자는 살던 집도 팔고 가르치던 대학도 그만둔 뒤 스코틀랜드 북부 하일랜드의 허허벌판으로 향한다.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천막집 유르트를 함께 지어 올리고, 나무 데크를 만들었다. 이후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장작을 패고, 밭을 갈고, 물을 긷고, 요리를 했다. 비록 사슴 사냥에 실패한 뒤 기르던 돼지를 잡아 바비큐 파티를 할지언정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나서도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실험은 처음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장작을 패다가 손가락을 다친 자원자를 급하게 병원으로 이송한 뒤에도 저자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원칙대로라면 분명 ‘유토피아 실험’은 문명과 단절된 원시의 공동체여야만 했다. 그렇다면 부상자를 병원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는지, 그러다 패혈증으로 손 전체를 잃게 된다면 누구 책임인지 등 저자는 자신의 상상력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또 다른 지원자는 SNS를 확인한다며 컴퓨터를 사용하려 했다. 저자는 컴퓨터는 유토피아 실험에 자원할 사람을 모집하는 용도로만 제한했으면 한다고 설명했지만, 그 지원자는 어떤 점이 실험의 일부인지 헷갈린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위기는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찾아왔다. 유르트라는 건축물을 세운 뒤 헛간을 부엌과 식당으로 개조하고, 직접 만든 갈대 하수 처리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관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 이다. 저자는 결국 원시로 돌아간 자급자족 공동체 유토피아에서 건축 허가를 신청하는 긴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절망에 빠진 저자는 “문명은 모래 늪과도 같다. 벗어나려 애를 쓸수록 더 깊이 빨아들여 규칙과 규제로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원시적 생활을 실험하기 위해 무수한 관료주의적 절차를 통과해야만 하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혀 재밌지 않은 아이러니였다. 반칙을 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는 정신분열과 우울증에 시달린 나머지 자기가 만든 ‘실험실’로부터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결국 10개월 만에 ‘유토피아’에서 탈출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 된다.

이 책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꿈꾼 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절망과 파국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물질문명의 최첨단과 문명 붕괴 이후의 가상 세계 사이에서 지독한 희망과 지독한 좌절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한 과학자의 경험을 지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쌤앤파커스. 316쪽. 1만6,000원.
/이보람 기자         이보람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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