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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지난한 정치여정 함께한 DJ의 ‘동지’

김 전 대통령 고비마다 지극한 내조로 뒷바라지
여성·어린이 등 보듬어 온 여성운동가 큰 발자취

2019년 06월 11일(화) 19:13
사진은 93년 8월 12일 김대중씨가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이희호 여사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지난한 정치여정을 함께 한 동지이자 동반자였다.

또 평생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의 삶을 보듬어 온 여성 운동가로써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1922년생으로 김 전 대통령보다 두 살 많은 이 여사는 마흔 살이었던 1962년 대한 YWCA 총무로 활동하던 중 김 전 대통령과 혼인했다.

이후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한 것을 시작으로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과의 투쟁 선봉에 선 정치인 김 전 대통령 뒤엔 언제나 이 여사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선거 때마다 이 여사는 ‘남편이 1진이라면 나는 2진’이라며 김 전 대통령이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골목을 누비고 발품을 팔았다.

김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초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섰을 때 ‘더 강력한 투쟁을 하시라’고 남편을 독려하는 등 강골의 운동가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사흘 만에 풀려난 이 여사는 다른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양심수 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석방 운동에 앞장섰다.

김 전 대통령의 첫 재판 때 검정 테이프를 입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하던 사진은 고된 옥바라지 속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이 여사를 기억하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1978년 연말 석방된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반복된 가택 연금으로 ‘동교동 교도소’라고 불리던 자택에 발이 묶였다가 1980년 5월 17일 또다시 연행됐다. 신군부의 5·18 광주 학살과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서막이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던 무렵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고, 지독한 관절염까지 얻었다. 그런 와중에도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했다.

1982년 말 미국으로 망명한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학과 교회 등에서 전두환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2년여 만에 귀국한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장기 연금과 도청, 감청에 시달리다가 1987년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6·29 선언이 있고 난 뒤에야 마침내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이어진 1987년과 1992년의 쓰라린 대선 패배,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1997년 대선 승리 등 고비마다 이 여사의 지극한 내조가 있었다.

이 여사는 청와대에 머무는 동안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명예총재를 맡아 결식아동과 북한 어린이를 도왔으며, 한국여성재단을 출범하는 데도 역할을 했다. 여성부 창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2000년 이 여사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 부부는 동교동 사저로 돌아왔으며,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 했던 동지이자 동반자와 작별했다.
/정근산 기자         정근산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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