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김으로 생명의 기운 창조하는 철우 곽금원 서각가



절대 고독 속에서 피어난 칼 끝 미학

새기면 새길수록 깊어지는 혼과 열정





칼 끝, 새김으로 생명의 기운이 돋았다. 혼은 글씨에도 그림에도 가득했다. 각수의 손끝이 어김없이 칼끝과 함께 했다.

한 자 한 자에 한 각 한 각이 모였다. 조화가 으뜸이라 각수는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모두를 가늠했다. 한 수를 내놓고 또 한 수에 들어가는 각수.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이수자 철우 곽금원 선생. 각수의 삶이 어느덧 40돌에 이르렀다. 여수 철우공방에서 그를 만났다.



글·사진 동부취재본부=우성진 기자



- 서각은 무엇입니까.

▲ 글과 글씨를 뜻하는 서, 칼을 사용해 새기는 각, 나무에 글씨를 새긴다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선조들은 훌륭한 글과 예사롭지 않은 붓글씨로 그 글을 나무, 가끔 돌에 새겼습니다. 제일 좋은 서각은 붓글씨를 새기면서 각수의 칼 맛이 풍겨오는, 흔적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글씨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수의 철학과 손 맵시로 더하거나 빼서, 새로운 글꼴과 그림, 어쩌면 화선지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서각입니다.

서각은 그냥 보고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글씨와 그것이 전하는 뜻, 내용을 모르면 본질적 의미의 서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학문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인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 그 시대가 원하던 것을 온전히 새길 수 있으려면 각수의 학문 수양은 기본입니다.



- 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처음에는 글씨가 좋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작업하는 데서도 글씨가 마음에 안 들거나 좋지 않으면 이것을 고칠까, 저것을 고칠까 하는 생각과 고민이 많아집니다. 글씨와 글꼴이 왼쪽 오른쪽으로 정열이 되고 조화를 이뤄야 각수의 손길도 그에 따라 움직입니다.

서예는 예로부터 문학과 미술 장르의 기준이었고 원칙입니다. 이것에 더해 서각은 서예를 좀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근본은 서예지만 조각이나 음과 양 같은 입체적인 것이 들어가고 각수 저 마다의 품이 다양하게 펼쳐짐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선생 작품

-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보유자이셨던 철재 오옥진 선생이 스승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연이 궁금합니다.

▲ 어렸을 때부터 나무를 깎거나 뭔가를 다듬는 것이 좋았습니다. 군 입대전 우연히 서울에서 친구와 영화를 보러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인사동 쪽으로 발길이 갔습니다. 정말 우연찮게도 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각작품들이 즐비했습니다.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곳이 나에게 펼쳐졌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다름 아닌 오옥진 선생님의 작업공간이었습니다. 제대 후 찾아가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추천을 통해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다행히도 친구가 서예 대가이신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서 글씨를 배운 인연으로 추천을 해주셔서 스승님의 제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40년이 넘은 지금도 당시의 만남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각가로서 안타까웠거나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다.

▲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스승님께 2년여를 배우고 익혀 고향 여수로 내려왔습니다. 나름대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호구지책으로, 급하니까 작품들을 선물로, 때론 값싸게 팔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저의 작품들이 가끔 엉뚱한 장소에서 훼손된 채 방치되거나 수리를 위해 제 곁으로 올 때가 생겼습니다. 그런 때는 마음 속 상처를 입고 ‘예술로 밥 먹고 살기가 쉽지 않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들을 겪을수록 땀과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정진했습니다.



- 일가를 이룬 지금, 보람이 클 것 같습니다.

▲ 정유재란 당시 ‘적은 병력으로 적을 대항하기 어려우니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는 선조의 밀지를 받은 이순신 장군께서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하가 죽지 아니했으니 왜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라고 장계를 올렸던 장소인 보성 열선루의 현판을 최근 완성했습니다. ‘열선루’는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장군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습니다. 요즘의 ‘사인’격인 ‘수결’역시 장군의 필체 그대로입니다. 충무공의 충정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사찰 대웅전이나 주련을 보고 저의 작품임을 아는 지인들이 휴대폰으로 찍어 저에게 자주 보내줍니다. 그때 역시 고마움과 함께 보람이 큽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 지금껏 세 번의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 전시회는 변화를 더 줄 계획입니다. 문화재청이 마련한 마케팅과 디자인 관련 프로그램도 수료했습니다.

요즘에는 소목 가구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실생활에 꼭 필요한 가구에다 서각의 존재감을 새겨 기능성과 작품성 모두를 갖추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전통문화에 대한 원칙은 고수하되 새로운 트렌드를 적극 반영하는 ‘법고창신’의 마음가짐을 아로새기고 있습니다.

저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이수자로서 전통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자긍심을 늘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 등급을 뜻하는 보유자가 한 명에 불과하고 전남도 지정 문화재로 선택받기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서각가들이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인정받고 후학들을 기를 수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저 역시 제가 가진 모든 기술과 물건, 작품들을 아낌없이 전수해주려 하나 여건이 녹록치 않습니다. 제 자신 스스로의 노력과 함께 문화예술에 대한 폭 넓은 애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