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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의 숨결 깃든 역사 발자취 따라가 볼까

■언론재단 '백제세계문화기행' 현장연수
공주 공산성부터 백제유물 다수 출토 무령왕릉까지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엔 백제인들의 소망 담겨

2020년 07월 16일(목) 09:29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공산성.
한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정립했던 삼국시대는 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 중 백제는 일찍이 서해를 통해 외국과 활발히 교류하며 타국의 발달한 문화와 예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변형·발전시켜 백제만의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창조해 냈다. 677년이라는 시간동안 삼국 중 가장 문화적으로 발전한 백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백제세계유산센터가 공동으로 기획한 ‘백제세계문화유산기행’ 현장연수. 지난 9~10일 지역 일간·주간신문 기자 20여명이 참석한 이번 연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지구인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 전북 익산시 일원에서 진행됐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백제역사지구 브리핑을 들은 후 공주 공산성과 무령왕릉, 익산 미륵사지, 국립익산박물관 순으로 답사가 이어졌다.

공산성 둘레에서 내려다본 금강과 금강교.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공산성. 백제가 부여로 천도하기 전까지 64년동안 머물렀던 이 성은 둘레 2,660m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금강을 끼고 있는 지형적 위치를 잘 활용해 언덕위에 성을 쌓아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등 면적을 지혜롭게 활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산성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길이는 약 700m. 남아 있는 산성 둘레를 따라 걷다 보면 탁 트인 금강을 배경으로 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금강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산을 넘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코로나19로 답답했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1971년 발굴 당시 무령왕릉 입구의 단단한 경화토를 제거한 후 입구에 있는 폐쇄석을 제거하는 모습.
다음으로 송산리고분군에 위치한 무령왕릉을 찾았다.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의 무덤인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을 아치형태로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이 곳에서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며 그 당시 백제의 문화를 파악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발생했다는 기묘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발굴을 위해 위령제를 지낸 후 입구를 막는 벽돌 하나를 들어내자 원인 모를 하얀 연기가 나왔다는 것. 이를 두고 무령왕의 영혼이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1971년 발굴 당시 무령왕릉 입구의 단단한 경화토를 제거한 후 입구에 있는 폐쇄석을 제거하는 모습.
공주에서 익산으로 떠나 향한 다음 목적지는 미륵사지와 근처 도보로 이동 가능한 국립익산박물관.

백제의 절 중 최대 규모로 신라의 황룡사와 쌍벽을 이루었을 미륵사는 현재 터만 남아있으며, 동탑과 서탑만이 남아 미륵사지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현재 복원돼 남아있는 동탑은 1991년 복원 당시 거의 모든 문화재위원들이 고증이 불가하다며 반대했음에도 불구, 노태우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졸속으로 복원됐다. 현재는 세월이 지나 때가 타고 낡아가면서 주변 풍경에 동화되고 있으나, 문화재가 아닌 복원품이기에 특별하게 보호받고 있지는 않다.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된 서탑은 1756년 영조 32년에 간행된 익산 읍지 금마지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에도 동방에서 가장 높은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벼락 등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붕괴를 우려한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일부를 보수했으며, 이후 2001년 문화재청이 석탑을 완전히 해체한 뒤 다시 쌓아올리기로 결정, 18년에 걸친 복원을 통해 지난해 4월 30일 세상에 완전히 공개됐다.

국립익산박물관에 복원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는 사리장엄.
근처에 위치한 국립익산박물관에서는 이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의 복원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사리장엄은 서탑 심주석 사리공에 다시 봉안되어 있다. 사리장엄은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를 비롯한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에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인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문신이자 학자들 중 하나인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여유당전서’ 제6권 지리집 제2권 강역고 변진별고에서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지리적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백제의 문화유산과 역사를 살펴보며 다시금 한 나라의 문화와 유산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오지현 기자         오지현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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