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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경의 심리학 교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장소와 공간에 숨겨진 심리학)
2021년 05월 26일(수) 11:26
출처 아이클릭아트
[한은경의 심리학 교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장소와 공간에 숨겨진 심리학)

글 한은경(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광주전남센터장)

아주 오래전 저녁 초대를 받아 간 지인 부부의 집에서 경험한 일이다. 평범했던 그 부부는 남들보다 뒤늦은 결혼을 통해 얻은 두 자녀들과 함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그 집에서는 그러한 보통의 행복이 쉽게 그려질 법한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고, 주방에선 먹음직스런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거실 전체를 꽉 메꾸고도 부족한 책장에는 아이들이 볼만한 책들이 서로 경쟁하듯 빼곡히 차 있었고, 외부인의 방문에도 아이들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로 열중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엄마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졌고, 남다른 교육열을 지닌 엄마다운 말투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남편이 귀가 전인 상태라 집안 곳곳을 소개해주었고, 소개의 마지막은 제일 작은 방이었다. 이런저런 짐들을 몰아넣은 듯 한 골방 느낌이 나는 그 방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용도실로 쓰는데, 텔레비전이 얘들한테 안 좋으니까, 이 방에다 넣어두었어요.”

텔레비전 화면에 부착된 바보상자라는 작은 메모지에 눈길이 가 있는 동안 안주인은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애들 아빠가 종종 와서 쉬는 곳인데, 주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휴식을 취해요.”

때마침 남편이 귀가했고, 다들 즐거운 저녁시간 한때를 보냈다. 소소하게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 가족을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아빠, 그리고 아빠만의 장소는 어떤 곳일까?바보상자를 들여다보며 작은 골방에서 쉬는 아빠와 거실에 당당히 자리한 책속의 위인간의 괴리를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마도 나는 그 집에서 아빠의 고유한 자리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겠거니 하고 그 일은 지나간 일이 되었다.

우리가 어떠한 특정한 사람을 마음속으로 떠올릴 때, 특정한 장소나 혹은 특별한 공간이 배경으로 함께 연관될 때가 있다. 일종의 장소에 관한 기억과도 같은 것으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장소기억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어떤 사항을 주위의 배경이나 장소와 관련하여 기억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때의 장소기억은 기억이 형성될 당시의 장소와 공간이 주는 의미에 대한 해석이 중심이 될 수 있다. 앞선 일화를 예로 들자면, 아이들은 아빠가 머무르는 특정한 장소(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이 있는 골방)와 공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해석(골방에서 머무르며 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아빠)을 중심으로 기억체계에 아빠를 저장했을 수 있으며,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아빠에 대한 기억은 이와 연관되어 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머무르는 고유한 장소 혹은 자리나 공간은 그 개인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협소한 의미로는 사무실 책상에서부터 자동차 내부, 침실이 될 수 있으며, 또 다른 인격을 보여주는 예가 되기도 한다.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가 잘 정돈되어 있는 침실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자동차 운전석을 지닌 개인은 상대적으로 더 정갈한 내면세계를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다 더 확장하자면, 한 개인의 고유한 공간(대개 집이 되는 경우가 많다)은 그 개인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어떠한 장소 혹은 공간이 자기 것으로 된다는 것의 의미는 우연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에 따른 것이다.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으로 향하는 반면, 위험하다고 지각하거나 불편한 공간은 피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가령, 자신의 사무실에 있을 때 편안함과 안정감은 최대치가 되는데(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게끔 공간적인 뒷받침을 받는데서 오는 위안과도 같은 것이다.

독일의 작가 발터 슈미트는 공간의 심리학이란 저서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공간의 비밀에 대해 행동과학 및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분석한 바 있다. 즉, 특정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며, 공간의 심리를 지배하는 가장 큰 요인을 편안함과 안정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공간심리학자인 바바라 페어팔은 자신의 저서 ‘공간의 심리학’에서 주거에 관한 인간의 욕구를 여섯 가지로 소개한 바 있다. 안전 욕구, 휴식 욕구, 공동체 욕구, 자기표현 욕구, 환경 구성에 대한 욕구, 심미적 욕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욕구 파악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욕구에 알맞은 공간에 있어야 인간은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장소나 공간이 주는 특별한 의미와 영향을 받는 존재다. 결국 우리가 위치한 모든 자리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또한 각자의 자리에 대한 저마다의 지분을 가짐과 동시에 타인의 자리에 대한 권리와 의무도 우리에게는 있다.

도박중독에 알코올 문제까지 있는 남편을 둔 한 중년의 아내가 했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늘 외딴 곳에서 몰래 도박을 하다 밤늦게 귀가 할때면 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슬그머니 들어와, 불 꺼진 주방 한편에 서서 술병채로 술을 마신 후 잠을 청하는 남편을 20년 넘게 보면서 살아왔었는데, 서로 바뀐 게 별로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어젯밤엔 난생 처음으로, 불 켜진 따뜻한 주방에서 남편이 편히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술상을 봐놓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는데, 정말 곤한 잠을 잤어요. 심지어 아침에 보니 남편이 술을 마시지도 않았더라구요.”

20년 넘게 소외시키던 남편의 자리를 발견하고 나서야 부부는 각자의 자리를 찾아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그리고 여러분의 지금 그 자리에는 어떤 이유가 있나요?



한은경 박사 (현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광주·전남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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