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경의 심리학 교실] 글쓰기에 숨겨진 심리학

글 한은경(심리학 박사, 임상심리전문가)

◇ 내가 글로 써내려가는 것이 내가 된다

한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올 한해 어떻게 보내왔는지 되돌아보며, 연초 세운 계획을 들여다보고 다가오는 2022년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나가야 할 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2년여 가까이 팬데믹을 거쳐 오면서 우리의 마음건강을 점검할 필요가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음에 상처가 났다면 적절하게 치료했는지 혹여 흉이 난 곳은 없는지, 정기검진이나 영양 상태는 어떠한지 그리고 질병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백신은 잘 맞고 있는지 등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우리는 홀로 있는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었고, 더불어 말보다는 글을 통해 표현하는 경험 또한 더 많이 하게 되었다. 특히, 어떠한 글이든 읽고, 그리고 글을 써내려가는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은 팬데믹이 우리에게 선사한 귀한 선물이기도 하다. 이미 글쓰기의 효과는 오랫동안 입증되어 왔지만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원리, 즉 심리학적 측면에서도 글쓰기는 그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대개 글쓰기를 통해 심리학의 원리 또한 잘 드러난다고 보는데, 몇 가지 이유를 열거해 보겠다.
먼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감추어진 내면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융은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shadow)’를 언급하며 성격의 양면성을 강조한 바 있다. 성격의 표면상으로는 잘 드러나진 않지만 우리 성격의 어두운 한 단면임에는 분명한 또 다른 자기의 모습을 말하는 것인데, 글쓰기는 자신이 미처 직면하지 못한 특정한 순간의 자신의 마음, 그리고 그때 마주하길 회피해온 감정들을 하나둘씩 표현하게끔 하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어두웠던 내면의 그림자와 조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그림자 또한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고 겉으로 드러나는 자기와의 통합을 시도할 있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더불어 평소에는 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무의식적인 측면, 잘 소화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생각과 감정들이 신기하게도 글속 사이사이에서 발견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노라면, ‘열등한 자기’에서부터 시작해 결국은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를 예로 들자면, 미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점을 비롯해서 자신의 욕구와 동기가 충족되지 못했던 부분들이 어우러지며, 자신의 열등한 부분과 결핍들이 글로써 드러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열등한 부분, 콤플렉스들을 마주하게 되는 직면과정은 그러한 결핍과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를 촉발시켜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비록 실현되지 못할지라도 이상적인 자기로의 방향성을 지니게끔 자신에게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것이 글쓰기의 힘이다.
또한 글쓰기는 메타인지(meta cognition)를 요구한다. ‘인지에 대한 인지’로도 알려져 있는 메타인지는 인간의 고차원적 능력 중의 하나로, 자신을 보다 객관화시켜주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글쓰기는 이러한 메타인지의 자연스러운 성장환경이 되어 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대개 자신에게 질문하고 자신이 답변하는 과정들이기도 한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을 한 발짝 더 밖에서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되고, 보다 진솔하게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인 것이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우리에게 치료적 도구(therapeutic tools)가 될 수 있다. 심리치료 이론중 하나인 이야기치료(narrative therapy)는 인간을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해서 이야기하는 존재로 보고, 한 개인의 문제적인 이야기를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조력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치료적 이득은 뭘까? 우선 처리되지 못한 생각과 감정들이 정리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과정이 때론 불쾌한 감정들을 촉발시키기도 하지만 지속적인 글쓰기 과정은 일상의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처리함으로써 결국 마음의 평온을 선사한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자신이 쓴 글의 첫 독자는 곧 자신이 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그냥 무심코 써내려가는 과정 자체에서 스스로 위안을 얻고, 또 언젠가는 타인에게 혹은 자신이게 읽힐지도 모를 글이 보관되어 있다는 안도감도 든다.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그때 왜 그랬지?’라는 후회의 순간들을 마주함으로써, 과거를 바꾸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염려로 우울한 감정에 쉽게 사로잡히며, 때론 이러한 감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과거로 가서 그때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고, 이러한 과거에 대한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만큼, 후회는 더 증폭되어 우리를 압도하기도 한다. 이때 과거의 나에게 손을 내미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의 내가 그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나, 비록 어리석고 바보같지만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수용하고 포용해주는 경험들. 이러한 과정들이 글쓰기를 통해 일어날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된다. 이때가 바로 과거가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더 이상 과거의 후회에 머물러 있지 않은 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변화된 자신이 존재하는 한 과거는 이미 변화되었다.
심리학자 로저스(Carl Rogers)가 언급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때, 역설적이게도 변화가 시작된다’는 말처럼 글쓰기는 우리에게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과도 같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후회와 아쉬움, 절망감의 터널에서 벗어나 결코 패배하지 않았음을 경험할 수 있고, 글을 쓰는 동안은 명확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가 있으며,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이 바로 글쓰기가 지닌 힘이다.

글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묻고 싶다. 혹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러한 자기검열은 글쓰기를 더욱 어렵게 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그냥 막 쓰라고 하고 싶다. 명저를 반복해서 읽는 것 또한 글을 잘 쓰는 가장 빠른 방법이 될 수 있다.
글쓰기의 힘에 대해 의문점이 든다면 제안하고 싶다. “나는 용서한다”로 시작하는 문장 다음을 자유롭게 써보기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위에서 언급한 글쓰기의 힘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 박사 △전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광주·전남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