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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한국전쟁
2021년 11월 25일(목) 14:20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남하하는 수천명의 피난민과 북상하는 아군의 모습
[김덕진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한국전쟁

글·사진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남북 정권과 미소 냉전

한국전쟁은 민족의 최대 비극이다. 이 비극의 씨앗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전쟁 때 군수·생활 물자를 팔아 돈을 벌어 경제부흥의 밑천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의 원인은 남·북한의 정권 수립과 미국·소련의 패권 경쟁에 있었다. 내전이자 국제전이었던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남북에 1948년 8월과 9월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다. 양 정부를 이끄는 이승만과 김일성이 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각각 반공·북진통일을, 민주기지론을 앞세운 남한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각기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체제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한국전쟁을 촉발하게 하였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체제의 확산을 막고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전략을 강화하였다. 소련도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중국에 고무되어 동아시아에 공산혁명을 확산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이렇듯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 남북 전쟁은 당초 물과 불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조국해방전쟁을 표방하며 38선을 넘어왔다. 1950년은 경인년이기 때문에, 이를 당시 사람들은 경인동란(庚寅動亂)이라 하였다. 화순에서 태어나서 광주에서 한의로 활약한 양재경(梁在卿, 1894~1976)이 지은 시를 보자.

<경인동란>

경술년(1910) 겨우 지나 경인년을 만나니
두 번이나 어찌 큰 변란을 당하는가.
폭탄 떨어진 때에 나무 돌도 불타고
비행기 가는 곳에 혼신도 산란하다.
남북의 전쟁은 당초 물과 불이오
동서로 떠도는 것은 바로 인민이다.
동복이 조용하단 말을 귀기울여 듣고
처자들을 함께 거느리고 잠시 피신을 했다.

‘경인동란’을 제목으로 하여 한국전쟁을 시로 읊은 이는 양재경 외에 더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반공정권 하에서 금세 ‘6·25사변’으로 변하였다. 50여년 지나 민주화가 추진되면서 ‘사변’이란 개념 대신 ‘전쟁’이란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남쪽과 북쪽이 싸운 것을 ‘남북전쟁’, 베트남의 남쪽과 북쪽 사람들이 벌였던 싸움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때 보수적 인사들의 반발이 엄청 거세었고, 지금도 잔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 북한군, 광주 시내로 들어오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한군을 밀어붙여 7월 3일 한강을 넘어 중순 무렵 전라도에까지 들이닥쳤다. 광주에 주둔 중이던 국군도 방어에 나섰지만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본래 광주에는 국군 제5사단이 본부를 두고 있었지만 육본의 명령에 의해 차출되어 타 전선으로 이동하였고, 대신 일선에서 후퇴한 낙오병과 학도병으로 새로 편성한 26연대가 주둔해 있었고, 경찰들로 구성된 경찰부대로 있었다. 7월 22일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장성 갈재 방어를 포기한 군경은 23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영산강을 못 건너오게 산동교를 폭파하고 후퇴를 서둘렀다.
당시 박철수 전남지사를 비롯한 박기홍 광주시장, 이응준 전남지구 편성관구사령관 등 주요 인사가 광주를 빠져나갔고, 23일 아침 마지막 군용 열차 편으로 우익계 인사들이 광주를 떠났다. 이들은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퇴각하였다. 이 열차가 지나자 남광주역 부근의 철교, 지원동 다리가 폭파되었다. “광주는 안전하니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할 것이며, 직장인은 직장을 지키라”는 경찰의 방송을 믿고 있던 광주 시민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 산동교, 광주의 한국전쟁 문화유산

장성에서 광주를 들어오려면 영산강을 건너야 한다. 이 영산강을 건너는 교량으로 산동교가 1934년에 228미터 길이와 2차선 폭의 콘크리트 다리로 건립되었다. 산동교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의 국도 1호선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일제 때 찍힌 사진이 남아 있어 당시 다리의 위용과 주변 경관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폐쇄되었지만, 다리 주위에 집수시설이 있어 그곳 물을 시내로 끌여들여 전남방직 용수로 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23일 군경과 중학생 학도병으로 조직된 5사단 26연대가 광주를 공격해오는 북한군 6사단 전차부대를 막기 위해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산동교이다. 그날 새벽 4시경에 군경은 산동교의 일부를 폭파하여 인민군의 진격을 막았으며, 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전력이 열세였던 아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전투 과정에서 김홍희 총경이 전사하였고, 장명규 경감은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에서 산동교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현재는 차량 통행은 금지되어 있고, 자전거나 도보 이용은 가능하다. 현재 강변에 친수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이 문화건강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산강 위를 가로지르는 산동교. 1934년에 건설되어 한국전쟁 중에 폭파된 후 사용되다가, 현재는 대체 교량이 건설되어 차량 통행은 중단되어 있다.
◇ 인민위원회, 우익인사를 처형하다.

북한군의 선발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에 들어왔다. 속속 광주에 들어온 북한군은 서석초와 수피아여고 등에 병영을 설치하고서 주둔한 후 치안의 장악에 나섰다. 또한 전남지방에 잔존하던 좌익세력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도 인민위원장에는 형무소에서 출감한 국기열이, 시 인민위원장에는 강석봉이 임명되었다. 국기열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펼쳤고, 해방 직후에는 건준 전남지부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이들 북한군과 좌익세력은 “빈부의 차이가 없는 좋은 세상이 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주 시민에 대한 선무공작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300여 명의 좌익인사와 일반죄수를 석방하였다. 그런가 하면 치안 담당부서로 내무부를 설치하여 우익인사의 색출에 나섰다. 미군정기 초대 도지사 최영욱과 호남은행장 현준호, 최태근, 박인천, 홍용구, 김삼수 등을 비롯한 우익인사 2천여 명을 체포하여 광주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이들은 유엔군의 광주 수복 때까지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500여 명은 북한군이 후퇴할 때 사살되었다. 그때 영암 출신의 재력가 현준호(현정은 현대 회장의 조부)도 죽었다.
북한군은 전남 각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 과정에서 북한군과 우리 측 사이에 충돌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곡성 경찰이 태안사 입구에서 곡성으로 들어오는 북한군을 막으려다 48명이 순직하였다. 이는 추념하기 위해 ‘태안사참전동지회’에 의해 충혼탑이 1960년에 태안사 경내에 건립되었다. 장흥에서는 이들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교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순국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국군의 광주 수복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으로 서울이 수복되었다. 부산쪽으로 퇴각해 있던 전남 경찰도 북한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기 위하여 마산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각 지역별로 수복작전을 감행하여 광주에는 10월 3일에야 진주하였다. 이 무렵 영암도 수복되었다. 나중에 ‘영암수복동지회’가 결성되어 영암 수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암공원에 “6·25수복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때 미군도 수복 공세에 가세하여 비행기 폭격을 감행하였는데, 오폭으로 곡성 지역은 화재가 나기도 하였다. 이때 조선초기의 인물인 마천목 장군을 향사하는 사당이 소실되고 말았다. 한참 지나 후손이 중건하기 위해 터를 닦다 땅 밑 항아리를 발견하고서 열어보니 그 속에 ‘공신녹권’이 숨겨져 있었다. 이 녹권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전남방직이 미군 폭격으로 불이 나 연기로 뒤덮여 있는 사진이 남아 있다.
전남 영암군 영암공원에 6·25 수복을 기념하기 위해 수복동지회가 중심이 되어 1998년에 건립하였다.
경찰이 광주에 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광주의 치안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미처 광주를 빠져나가지 못한 좌익세력은 무등산, 영광 불갑산, 구례 지리산, 화순 백아산, 광양 백운산 등으로 들어가 야음을 틈타 시내로 잦은 출몰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찰은 도청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겨우 방어만을 하였을 뿐이었다. 10월 15일 국군 11사단 제20연대가 광주에 진주해옴으로써, 광주의 치안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 공비토벌과 포로수용소

광주가 수복되었을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던 인민군과 좌익세력 빨치산은 산악지대로 들어가서 계속 활약하였다. 군경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공비토벌’이라는 이름으로 펼쳤다. 20연대가 광주 서석초에 본부를 설치하고 제1대대는 화순에, 제2대대는 장성에, 제2대대는 담양에, 그리고 특별대대는 곡성에 주둔시켜 경찰과 합동으로 빨치산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빨치산들이 20연대 본부를 기습 공격하여 체포되어 있던 동료를 석방시키고 도주하였고, 그 과정에서 서석초등학교 교사가 불나는 참사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1953년 3월까지 토벌작전이 계속되면서 많은 공비들이 희생되었는데, 그 공을 세운 사람에 대한 공적비가 적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공비들이 깊은 산 속 사찰에 은거하는 바람에 많은 사찰이 소실되는 비운도 발생하였다. 이때 전북 경찰국 소속으로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된 차일혁은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의 사찰을 소각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사찰을 전화에서 구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사 구례 화엄사 경내에 2013년 “차일혁 경무관 추모비”를 세웠다.
전남 영암군 영암공원에 6·25 수복을 기념하기 위해 수복동지회가 중심이 되어 1998년에 건립하였다.
인민군과 빨치산 가운데 생포된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일부는 포로가 되어 광주에 수용되었었다. 광주에는 ‘중앙포로수용소’, ‘상무대포로수용소’ 등 두 곳의 수용소가 있었다. 전자는 현재 조선대 정문 건너편~전남대병원에 터가 있었고, 이곳에는 160개의 천막이 설치되어 4만 8천여 명 정도가 수용되었는데 대부분 빨치산들이었다. 1953년 6월까지 운영되었고, 그 사이에 이승만 대통령과 백야사 사령관 백선엽이 방문한 적이 있다. 후자는 옛 상무대 자리에 터가 있었고, 그곳에는 북한군 비송환자 11,637명이 상무대와 인근 분소에 수용되어 있었고, 수용 중 수용소를 나와 도로 보수나 철로 수리 등의 작업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 도처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무엇보다 같은 민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는 것도 비극이었지만, 전쟁의 가장 잔인한 이면은 전투 요원보다 비전투 요원 즉 민간인이 더 많은 희생을 냈다는 것이다. 6·10항쟁 이후 그동안 숨겨져 왔던 진실이 생존자와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민간인 희생자의 많은 부분이 바로 남한 정부에 의하여 저질러진 집단학살이었다는 것이다.
전남에서도 곳곳에서 ‘빨치산’ 혹은 ‘부역 혐의자’ 등으로 몰려 수많은 양민이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그 중에서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 사이에 수복 및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11사단 20연대와 9연대에 의해 자행된 담양, 영광, 장성, 함평, 화순 등지에서의 양민학살을 들 수 있다.
국군의 수복 이후 퇴로가 끊긴 인민군 및 지방좌익은 남부지방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후방교란작전을 펼쳤다. 특히 담양에서는 추월산을 중심으로, 장성에서는 수련산과 태청산, 화순에서는 백아산과 모후산 및 화학산, 영광과 함평에서는 구수산과 불갑산을 중심으로 다수의 빨치산이 집중되어 있다.
이들을 토벌하는 데에 투입된 군인들은 민간인과 빨치산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민간인과 빨치산을 분리하고 빨치산을 고립시키기 위해 산간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을 면소재지나 수복지역으로 소개시키는 작전을 펼쳤는데 그 과에서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하여 작전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빨치산 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하였고, 이로 인해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특히 함평의 경우 1950년 12월 6일부터 이듬해 1월 14일까지 40일 동안, 국군 제11사단 20연대(전남지구전투사령부) 2대대 5중대에 의해 해보·월야·나산 등 3개 면에서 1천여 명의 양민들이 집단 학살되었다. 이를 다룬 책도 출간되었고, 월야면에 조그마한 위령비도 건립되었다. 진상조사, 발굴, 위령탑 건립 등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 보도연맹 사건

집단학살 가운데 민간인 학살 외에 보도연맹원 학살이 있다. 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단체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을 보호하고 사상을 교화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였던 이들을 강제로 전향시켜 만든 보국연맹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보도연맹은 좌익 성향의 인사를 통제·감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 경찰서의 지시에 따라 각 군·면·동 단위로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전향자들은 보도연맹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구속되었다.
전남지방에서도 1949년 후반 보도연맹지부가 결성되었다. 국기열이 지부장을 맡았으며, 심사과장은 영암 출신인 김준식이 맡았다. 전남지부에서 지부장의 권한은 상징적이었으며 실권은 심사과장과 경찰서 사찰계에 있었다. 심사과장이었던 김준식은 경찰 협력자 출신으로 갑·을·병 등급분류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보도연맹은 가입이 자발적이 아니었던 만큼 정규교육 등 집단 행사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남하가 계속되자 정부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을 북한에 협력할 수 있는 잠재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학살하게 되었다. 전남지역에서는 광산지역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광산지역 보도연맹원들에게 1950년 7월경 소집령이 내렸다. 지서에 모인 사람들은 갑·을·병으로 분류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대마 껍질로 노끈을 꼬게 하였다. 당시 지평동에는 산사태로 큰 골이 깊이 파여져 있었는데, 이들은 이곳에서 총살되었다. 미처 총살하지 못한 보도연맹원들을 생매장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시체가 무려 499구였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하였다. 이같은 집단 학살극은 경찰이 퇴각하기 전인 7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광주 시내에서도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경찰서·형무소 등으로 불러 모아 그곳 현장이나 증심사 계곡 등지에서 집단 사살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연해·도서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보성에서는 전남사범을 졸업한 후 민족교육을 행하였던 윤윤기가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때 구례 경찰서장 안종삼은 사살 명령이 내려진 국민보도연맹 수감자 480명에 대하여 “여러분들을 모두 방면합니다. 내가 만일 반역으로 몰려 죽는다면 나의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인도적 석방을 행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지리산, 백운산 입산 양민 2만여 명을 귀가 조치한 바도 있다. 이를 높이 사 2012년에 구례 경찰서 경내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한편, 북한군이 진주하자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은 경찰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보복하였다. 이처럼 직접적인 전투가 아닌 민간인 학살과 그에 대한 보복 살상은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발생하였다. 다시는 이 땅에서 벌어져서는 안될 일이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노력도 전향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 전쟁의 잔상, 피난민 월북과 이산가족 간첩 사건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한 장면
전쟁은 피난민도 많이 발생시켰다. 특히 전남은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하여 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많았다. 당시 피난민들은 정부를 따라 부산에 가장 많이 갔지만, 남쪽의 끝인 목포에도 많이 와 있었다. 목포 피난민들이 정착하였던 곳이 바로 대성동이었다. 목포에 온 피난민 가운데 일부는 장흥 남쪽 바닷가 쪽으로 가서 갯벌을 막는 간척지 공사를 펼쳐 정착하였다. 분단의 고착화로 이 피난민들은 임시로 왔던 피난처에 주저앉아 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가족간의 헤어짐을 강요하였다. 이 헤어짐에는 사별뿐만 아니라 생이별도 포함되었다. 무차별적인 연합군의 폭격으로 집을 잃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였다. 납북·월북자도 적지 않았는데,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남평 출신의 작곡가 안성현이 월북하였다. 납북자·월북자와 함께 그 가족은 모두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이고, 아직도 이산가족 상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이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산가족 상봉 때 울부짖는 남도인의 모습은 언제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안타까운 사연은 납북·월북자 가운데 나중에 남파되어 가족을 몰래 만났다가, 그 사실이 나중에 정보기관에 발각되어 가족들이 간첩으로 몰려 기나긴 감옥 생활을 하였던 점이다. 당시 정부는 그것을 정권 연장이나 위기 극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안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정보기관이 ‘가족 간첩단’ 또는 ‘고정 간첩단’ 등으로 부풀려 발표하여 해당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현 광주교총 회장 △현 광주교대 교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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