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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김대중 정신계승 글짓기대회 고등부 대상

나의 삶 나의 길
박한빈 경신여고 2년

2021년 12월 08일(수) 16:43
박한빈
길을 걸었다. 무작정 뜀박질을 했다가 조금 느려지길 반복했다. 멈추는 일은 없었다. 멈추는 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앞서는 또래들과 발을 맞추려, 계속해서 앞을 향해 쫓기듯 걸어야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쯤에야, 수없이 찍어내던 발자국이 그보다 앞서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도, 그렇다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겁이 났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음이 불안했고, 과거에 대한 후회가 날 짓누르는 것 같아 두려웠다. 파랗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는 소용돌이쳐도 나만은 굳세리라 믿었던 내 마음 어디 가고 때때로 마주했던 나비의 날갯짓에도 내 마음은 더 이상 올곧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요동쳤다. 그러다 어딘가 텅 빈듯한 마음에서, 뭔가 잃어버렸음을 확신했다.

내가 걸었던 모든 시간 속 찾아왔던 나비와 우울한 마음을 대변하듯 내리던 장맛비, 잡힐 듯 놓쳐만 간 낙엽 잎, 세상 그 무엇보다 맑은 색으로 마음을 간지럽히던 눈송이가 왔다 가길 18번.

어느새 멈춰진 걸음 뒤로 수없이 찍혔던 발자국조차 빗물에 희미해지고 하얀 눈에 덮여 자신의 흔적을 지워내며 마치 자신을 이제 그만 잊어달라는 듯, 하나하나가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깊이 박힌 발자국이 어찌나 깊던지, 그 상처를 포근한 눈으로 지워내기엔 그저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멈춰진 발자국에 오른 채로 그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상처 속 기어코 반짝이는 보석에 이끌려, 지나온 길에 발자국을 따라 다시금 발을 내디뎌 본다.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마주했던 건 다름 아닌 ‘순수함’이었다. 어릴 적 어딜 가든 날 따라오는 달을 보며 마냥 신기해하던 내 웃음이 별거 아니게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순수한 마음을 잃어 방황하는 어른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던 때가 생각났다.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파란 건 파랗게, 둥근 건 둥글게 봐야 하는 세상을 어느 순간부터 얼룩진 파랑과 찌그러진 동그라미로 봐야 한다는 것이 어릴 적 내 마음에 어느 곳보다 지옥일 수 없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순수함을 되찾아 품에 안고는 수없이 찍힌 발자국들 사이로 보이는 보석들을 찾아 또 한 번 되걸어가 본다.

수북이 쌓인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한 끝에 마주한 그곳엔, 예쁜 단어들이 여전히 내 것으로 남아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하얀 눈에 덮이는 순간까지도 제각기 다른 색으로 빛을 내는 보석들이 여간 눈부실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자아’라는 이름의 보석이었다. 수동적인 사회에 휩쓸려 나 자신조차 잃어가던 내 삶에 대해 생각하니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만 같았고, 내 삶의 주체는 나인 것이 당연시되어 학습해온 모든 시간이 사실상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내 기분은 늘 옆 사람에게 기준 두었고, 내 삶을 누군가 끌어주길 바라며 이리저리 치이고 끌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 와중에도 선택과 책임이라는 끈이 두려워 잡을 수 없었던 내 모습에, 누구에게도 향할 수 없었던 원망의 화살은 나에게로 돌아와 꽂히길 반복했다. 그래서 막상 놓고 있던 내 자아를 마주한 순간에도 손에 넣기까지 한참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망설였을까. 그저 보고 있기에도 지칠 때쯤, 생각 없이 펼쳐져 있던 손에 불쑥 스스로 자아가 파고들었다. 놀란 것도 잠시, 아름답다는 말조차 담아내지 못할 만큼의 아름다움이 내게로 와 번졌고 이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 더욱 꽉 움켜쥐었다.

그렇게 자아를 손에 쥐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다시 정지 지점을 향해 돌아가길 마음먹었을 때, 행복이 날 좇아 저 멀리 걸어왔다. 간만이었다. 내가 찾을 땐 보이지 않던 행복이란 존재가, 잊고 있을 때쯤을 약속이라도 한 듯이, 행복은 항상 불현듯 찾아왔다.

행복은 때때로 제멋대로였고, 난 그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수도 없이 떠났던 것 같다. 그러다 가끔은 완벽한 행복의 존재를 확인하려 애쓰기도 했다. 완벽한 행복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행복은 때를 모르고, 완벽은 길을 몰라서, 둘은 마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목적이란 이름으로 완벽한 행복을 찾고자 했다. 그 행복이란 강박에 얽매여 지나간 모든 것이 아픔이 되어버렸단 걸 깨달은 순간에서야 나는 그것을 잠시 놓아주기로 다짐했다. 그제서야 행복은 나를 찾아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마음속 빈칸에 보석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행복과 맞닿았을 때,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걸을 용기가 마음속에서 몸부림쳤고, 주섬주섬 꺼낸 그 용기를 벗 삼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내가 수없이 찍어둔 발자국 덕분에 땅 위에 눈은 평평함을 자랑하듯 드넓게만 보였고, 쌓인 눈을 비집고 나온 푸른 잎들이 나에게 수고했다며 인사를 건네왔다. 이미 또래 친구들은 한참을 앞서가 점으로 보이고 있었지만 난 이제 조급하지도, 두렵게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나는 다시 정지 지점을 지나 내일의 시작점에 멈춰있다. 이젠 잠시 멈추는 법을 배웠고 다시 나아가는 법도, 뒤를 되돌아보는 법도 안다. 길을 걷다 보면 오로지 나뿐인 내 길 속에서 아무에게도 향할 수 없는 원망의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와 꽂히는 걸 막을 순 없지만 조금 덜 아프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새겨지는 발자국들을 보석으로 보는 법과 작은 것들에 기뻐할 여유 또한 깨달아갔다.

우리는 때가 되면 꽃이 피고, 하루가 가면 조용한 새벽만이 남는 이유를 알 수 없듯이 나는 여전히 나의 길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유 없이 예쁜 꽃은 한없이 자라고, 어김없이 새벽은 오듯이 나 역시 알 수 없는 길의 앞을 향해 다시금 발걸음을 떼어본다. 그 어떤 이유도 없이 한 발짝, 또 한 발짝 멈췄던 발자국을 뒤로한 채 앞서간다.

이제 내가 잃었던 나의 마음들과 예쁜 단어들은 내 그림자가 되어 나를 뒤따른다. 그 예쁜 그림자는 하얀 눈이 쌓여갈수록 더욱더 까맣게 빛이 나고, 내 한걸음 한 걸음은 삶이란 이름으로 눈 위에 새겨진다. 그렇게 내가 걷는 모든 길은 내 삶이 되고 내 역사가 되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간다. 언젠가 내가 걷는 이 길이 누군가의 지름길이 될 수 있게끔 천천히 나아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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