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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김대중 정신계승 글짓기대회 고등부 대상

길을 잘못 들다
나지환 영흥고 1년

2021년 12월 09일(목) 15:46
나지환
오늘, 아침부터 제법 쌀쌀하더니 오후부터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고 내리더니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이네요. 누군가 어떤 건물의 문을 열더니 바깥공기를 들이쉬며 허리를 뒤로 젖히고 위를 바라봅니다. 아하! 이곳은 도서관이었군요. 문 바로 위에 떡하니 ‘도서관’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는데 모르는 것도 이상합니다.

-째깍, 째깍-

지금 시각은 22시 40분, 도서관이 문을 닫기 조금 전입니다. 아마도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 도서관은 주변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지라 눈이 수북이 쌓인 내려가는 길은 조금 위험해 보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나겠어요!

-뽀드득, 뽀드득-

다행히 그는 눈길을 무사히 내려와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고단한 하루였는지 의자에 앉아 쉬어보려는 듯했지만, 눈투성이 의자에 앉았다가는 감기에 걸릴걸요? 그러기 전에 엉덩이가 얼어붙을 테고요. 그는 어쩔 수 없이 멀거니 서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끼이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도착했습니다. 그는 재빠르게 버스 위로 올라타 자리에 앉습니다. 바깥 날씨가 어지간히도 추웠나 보네요. 따뜻한 히터 바람을 맞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이 감깁니다. 이런 의자에서 자는 것은 그에게 끔찍한 요통을 선사하겠지만, 자연의 이치를 한낱 인간이 어찌 거스르나요. 그는 그대로 곯아떨어졌습니다.

-드르렁, 쿨쿨-

“삐리 리 리!!” 불시에 울린 전화벨이 그의 잠을 깨운 덕에 그의 허리는 아직 비명을 지르지는 않는군요. 그러든지 말든지 단잠에서 깬 그는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입니다. 당장에라도 내려앉을 듯한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는 전화를 받습니다.

“어디여?”

그의 가족일까요?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입니다. 힘이 넘치고 발음이 뚜렷한 것이 어지간한 젊은이보다 더 건강해 보이네요.

“아…. 할머니…. 버스요….”

예,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확실히 건강한 것 같습니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아주 가뭄이 따로 없군요.

“학생이라는 놈이 밤에 잠을 안 자고 뭔 딴짓을 혀, 긍께 졸려 죽겄제!”

잠깐 손자의 건강을 위한 설교를 끝마친 할머니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전화를 한 원래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느그 애비 낼 생일잉께, 오는 길에 시장에서 홍애나 사갖고 들고와.”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탄성을 지르며 알겠다며 대답합니다. 다행히 시장 부근을 지나기 전이었는지라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고는 횟집을 향해 걸어가기로 합니다.

-터벅, 터벅-

아시려나 모르지만, 홍어는 꽤 비쌉니다. 그는 차라리 그 돈으로 치킨을 사서 먹지 하고 생각하는 편이지요. 다행히도 오늘은 행운이 따라주었습니다.

“오늘 막 손님이네~? 이거는 공짜로 가져가!”

거진 3만 원정도 아낀 셈이군요. 횡재했습니다. 혹시나 냄새가 풍기거나 옷에 배지는 않을까? 약간 걱정을 하며 다시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정류장에 선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제법 되는 날이네요.

-드르렁~! 쿨쿨~-

몸에 가득 찬 피로는 흔들리는 버스의 진동마저 수면제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버스에 타자마자 정신을 잃고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이 조금 꼴불견이네요. 이번에는 누군가 깨우는 일 없이 단잠을 즐깁니다…. 조금 오래 자는 것 같은데요?

-덜컹-

결국,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한참을 지난 곳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부터도 제법 도시와 떨어지는 외곽지역인데 그보다도 더 바깥쪽이라니, 단 한 번도 이런 곳까지 와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번 버스가 막차였어요! 집까지 가려면 걷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터벅, 터벅-

불행 중 다행이라면, 버스에서 내릴 때 방향을 기억해 두었기 때문에 방향을 헷갈릴 일은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딱히 갈림길도 없어서 길을 잃을 일도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침 눈도 그치고 바람도 불지 않아 그렇게 춥지도 않네요.

-터벅, 터벅-

그에게는 생전 처음 있는 경우였습니다. 가끔 내릴 타이밍을 놓치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몇 정거장을 지나갔는지도 모릅니다. 주변에는 도로, 도로 옆의 울타리, 울타리 바깥의 나무와 이상한 풀떼기들이 전부군요. 위치를 특정할 만한 큰 건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 애초에 건물이 없군요?

-터벅터벅-

정류장 주변을 벗어나자 그나마 앞을 보게 해주던 가로등도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주변의 형체가 대충 뭉개져서 보입니다. 뭐, 이 정도면 걷기에는 충분합니다.

-터벅, 터벅-

달이 구름에 가려지자 정말 발밑 언저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각을 잃은 것보다는 나은 수준인 것 같습니다. 뭐, 이 정도면 못 걸을 정도는 아닙니다.

-터벅, 터벅-

겨울이라서 그런 걸까요.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은 잔잔하다 못해 완전히 멎어서,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 ##-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홍어의 냄새가,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의 무게가, 추운 겨울날을 버티기 위해 두껍게 입은 옷이 땀에 푹 젖어 느껴지는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옳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걸어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애초에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죽은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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