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가 열렸다. 3년 전에 심었던 대추나무다. 많이 열리진 않았으나 제법 알 굵은 몇 개가 저도 대추란듯 호기롭게 열려있다.

참으로 신기하다. 누가 저더러 대추라며 대추를 열라 했는가. 아니다. 제가 대추인 줄 알고 스스로 알아서 대추를 연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만큼 햇살 한 줌 바람 한줌 천둥 한 소리의 사랑을 동정받아 처음으로 연 것이다. 대추 알엔 하나님의 입김이 서려 있고 참 잘 하였구나 하나님의 음성도 들어있다.

마침 하룻밤을 지내는 덕에 달을 보러 밖으로 나왔더니 글쎄 대추나무에 별이 열렸다. 대추나무에서 빛나고 있는 대추별들이 달빛 아래서 무슨 얘기들인지 도란도란 정답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밤엔 별이 되어 자라다가 낮엔 대추로 크는구나. 그렇게 밤과 낮을 살았구나. 그러고 보면 세상의 무엇 하나 신비롭지 않은 것 없고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것들도 이리 자연하게 일어나고 생겨나고 있었구나.

할머니는 그러셨다. 열매가 되는 모든 것은 정성 들인만큼 큰다고. 그 정성이라는 것은 눈빛으로도 가고 손길로도 가고 마음으로도 간다고. 한줄금 내리는 비의 사랑으로도 가고 지나가는 바람 한 가닥의 훈수로도 가고 한나절만큼의 햇빛 사랑으로도 간다고. 그렇게 가고 오는 정성과 사랑만큼 꼭 그만큼의 열매 크기와 맛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런 할머니의 염려까지 훈수가 되어 크기가 되고 맛이 드는데도 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아내는 나랑 대추나무를 심으며 뿌리를 잘 뻗고 잘 살아나서 이쁘고 맛있는 대추 열어달라며 주문 같은 기도를 했었다. 그것도 사랑 한 뼘쯤이 되어 뿌리를 더 튼실히 하게 했을 것이고 단맛이 드는 데도 일조했으리라 본다. 그러고 보니 나만 보탠 게 없다. 구덩이 팔 때 힘 좀 쓴 것 외엔 심어놓고 3년 동안도 뭘 해 준 게 없다. 오고 갈 때마다 그저 스쳐가듯 눈길 정도나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런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고맙다고 한다. 그렇게 저들은 자라고 살고 빛나고 있다. 밤에는 별로 살다 낮엔 탐스런 열매로 빛나는 대추가 이리 열린 것이다. 다음날 떠나오면서 몇 개 따볼까 살그머니 다가갔더니 하 글쎄 뭐가 수줍은지 살짝 볼이 붉어지지 뭔가. 그런 걸 차마 딸 수 없어 다음에 다시 보자 하며 발길을 돌린다. 며칠 있다 다시 오면 아마 그땐 데려가달라 할 게다. 그렇게도 인연이 되는 그와 나 아니겠는가. 한입 가득 톡 갈라지며 맛을 터트려 줄 대추 한 알의 정겨운 맛이 벌써 기대된다. 저렇게 가을을 풍성하게 하는 저들이 있기에 가을도 가을다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추가 열렸다는 것만으로 기쁨이 열리고 행복도 열린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행복도 대추 한 알만한 크기로부터 시작될 것 같다.

무심히 지나면 대단할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것들조차 조금만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게 달라진다. 아름다움이고 행복이고 기적이 된다. 가슴 벅찬 황홀함으로 그들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수줍어지는 그들의 볼이 다가오고 아아라히 전설처럼 달큰한 맛이 스며난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떠나오는데 멀어진 만큼 어젯밤 보았던 대추별이 다시 보인다. 아 낮에도 별이었구나. 멀리서 보니 또 달리 보이는구나. 그래 이제부터 넌 별 대추다. 한입 가득 별을 삼킬 다음 주를 기대하마.

대추가 빛난다. 3년 전에 심었던 나무에서다. 하얗게 파란빛이 붉게 변해가는 한 주일 동안 너희가 바꿀 하늘빛 땅 빛도 생각한다. 너로 인해 변해갈 세상 모습과 변해 있을 네 모습까지도 신비다. 대추가 열렸다. 내 마음 가득히도. 별대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