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도수를 좀 낮춰도 되겠다는 안경사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뱅글뱅글 도는 무거운 안경으로 인해 생긴 일들이 앞뒤도 없이 와락 밀려든다. 여름이면 땀에 뒤범벅이 된 얼굴 위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안경의 불편함이나, 추운 겨울 김이 서려 더듬거리던 일들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하다가 엎드린 채 잠이 들어 망가져 버린 안경만 해도 몇 개였는지 모른다. 테이프로 덕지덕지 얽어맨 안경을 겨우 걸치고 시험을 치를 때는 그저 울고만 싶었다. 더더욱 한심한 일은 목욕탕까지도 안경을 쓰고 들어가야 했으니….

중학교 입학과 함께 0.1도 못 되는 시력 판정을 받고는 장님이라도 된 것만 같아 종일 울먹거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장신구를 착용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안경들을 쓰고 다니지만, 그때만 해도 반에서 겨우 한두 명 정도였다.

눈으로 인한 고행이 나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7명이나 되는 동생들이 줄줄이 내 뒤를 따랐다. 부모님은 팔순이 될 때까지 건강한 눈을 가지셨는데 어인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보안경이라도 좀 쓰고 싶어도 자식들 혼사에 유전으로 오해받을까 봐 자중했노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자 형제 여섯 명의 남편들이 모두 크게 속아서 한 결혼이라고 야단들이다. 결혼 전에는 콘택트렌즈를 끼고 환한 얼굴로 다니다가 아이 하나쯤을 낳고 나면 코 위에 턱 걸쳐지는 안경을 보면서 황당했을 법도 하다.

이상한 일은 식구가 되어 들어온 사람들마저 한결같이 안경쟁이들이니 억울할 일도 아닌 듯하다. 사위들은 물론이고 며느리들, 심지어는 태어난 2세들까지도 안경을 착용해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온 식구가 모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리법석이다. 아침잠에서 깨어나면 더듬거리다가 남의 안경을 끼고 나서는 사람까지 생겨 교통정리를 해주어야 할 입장이다.

한번은 안경을 모두 벗고 벽에 걸린 달력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얘기하게 되었다. 기러기들이 줄지어 나는 것 같다는 사람, 고랑을 타 놓은 밭두둑 같다는 사람, 점자책 같다는 사람 등 마치 장님들끼리 코끼리 만져보기라도 하는 것 같아 한참을 깔깔거렸다.

정말 다시 태어난다면 시력 2.0쯤 되는 맑은 눈을 가지고 반짝이는 얼굴로 다녀보고 싶다. 한데 요즈음 새로 맞출 때마다 안경이 근사해지고 있다. 분명 근시안의 진행이 멈추고 원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이지만, 나처럼 고도 근시인 사람은 돋보기를 써야 할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한다. 거기다 두꺼운 근시 안경이 점점 폼이 나는 예쁜 안경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밤새 책을 읽다가 흘린 눈물로 베갯잇을 흥건히 적시곤 하던 학창 시절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편안하고 아늑한 모습으로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돋보기가 아닌 멋진 근시 안경으로 깨알 같은 글자의 고전들을 척척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느지막이 주어진 커다란 축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