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왜 우리는 문제를 못 푸는가
정진탄 뉴미디어본부장 겸 논설위원


자주 다니는 버스정류장 바로 뒤편에 허름한 과일가게가 하나 있는데, 50대로 보이는 남자 주인이 꽤 부지런하고 친절해 장사가 잘 되는 듯 보인다. ‘나도 과일장사 한번 해볼까’ 하는 유혹을 받곤 한다. 특별하다랄 것 없이 바구니에 과일을 담아놓고선 오려진 종이박스에 5,000원, 10,000원 이렇게 가격을 써놓았다. 그런데 행인들, 특히 아줌마·아저씨들이 힐끗힐끗하며 안 살 것처럼 하다가 사는 모습이 재미있고 저런 ‘착한 거래’를 해봄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은 스치는 수준이 아니라 진정 그렇게 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긴다. 최근엔 과일가게 오픈을 플랜B로 하고 김밥가게를 대학가 주변에서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해봤다. 부지런하고, 매너 좋고, 무엇보다 맛이 최고면 손님이 안 오리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김밥 맛을 당장 최고로 낼 수 없으니 음식솜씨가 탁월한 예쁜 아줌마 한분을 섭외 해놓았다. 여차하면 몇 평 안 되는 조그만 공간을 얻어 장사를 해보려는 심산이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안 해본 이 같은 구상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진솔한 삶을 제대로 느껴보자, 이리저리 부대끼는 샐러리맨의 애환에서 벗어나 고객과의 교감을 해보자는 소망이다.

사회적 가면 벗고 교감

젊은 시절에는 어떻게 하면 유식하게 보이고, 멋진 잡(Job)을 잡아 폼 내볼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적인 현란함을 좋아해 무조건 하루 1권씩 책을 사가지고 와 집에서 독파하겠다는 다짐을 하고선 실천할 때가 있었다. 당시엔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다 놓아버린, 비워버린 후의 액면 그대로, 날것 그대로가 좋다. 욕망이 들끓을 때 무엇을 채우려고 욕심 부렸지만 지금은 무엇을 빼내려고 힘을 쓴다. 물론 비움은 힘을 쓰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로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다 비우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다 보이는 역설을 느껴본 분은 안다. 길거리 과일장사, 김밥장사를 계획하는 것은 그런 연장선에 있다. 사회생활의 가면을 벗겨내고 뭇사람과 교감하며 삶에 내재한 온전함, 고유성, 본질을 느껴보기 위한 작은 바람이다.

이런 시각은 한국정치, 광주와 전남의 복잡다기한 이슈를 대하는데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잣대도 들이대지 않고 오로지 순수하고 청정한 마음, 본래의 눈, 다시 말해 양심으로 보면 대상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자면 좌파의 눈으로, 우파의 눈으로, 민주당의 눈으로, 국민의힘 눈으로 틀을 씌워 접근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한번 봐보자는 거다. 유명 학자가 이렇게 말했고, 저렇게 이론적 틀을 제시했다거나 기존 이론에 의존해 당대의 삶을 해석하는 것을 멈춰보자는 거다. 3김 시대와 민주화 투쟁시절에는 이랬는데 왜 지금은 이러느냐 하는 시각의 틀, 준거의 틀을 한번 치워보자는 거다.

정치인이 전통시장을 가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무엇에 덧씌워진 시각이 아닌 순수한 열정으로 일하는 시장 사람의 말을 경청해보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론적인 현란한 말이 아니라 진솔한 삶의 현장에서, 생생한 소리를, 마음의 소리를 청취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싶다. 문제는 그 속에 답을 갖고 있다. 개인 문제는 그 개인에게 고유한 것이며, 광주·전남 문제는 광주·전남에 고유한 것이며, 한국 문제는 한국에 고유한 것으로, 남의 것은 참조용일뿐 해답을 제시해줄 수 없다. 본질적인 해결책은 결국 고유함을 간직한 주체, 즉 해당 개인과 광주·전남, 한국 당사자에게 주어져 있다. 많이 배웠다는 분은 남의 것만 많이 봐서 헛똑똑이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점에서 지식기술자는 사실 별 효용이 없고 일만 복잡하게 하는 부류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권장돼야 한다. 단체장이 민생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택시비 인상을 해야 하는데 얼마나 해야 하며, 시민의 발인 대중교통버스가 멈췄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직접 보고 듣는 것이다. 복합쇼핑몰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혼잡한 백화점 매장을 직접 둘러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여러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사안의 고유성을 직접 보고 해결책을 찾는 방법인 것이다.

시각·준거의 틀 탈피

강기정 광주시장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또한 같은 맥락이다. 광주가 갖고 있는 문제의 고유성을 보려는 시도다. 강 시장은 각종 기자회견을 통해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언급해왔는데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과거와 다른 광주를 건설하기 위한 철학적 선언이다. 복합쇼핑몰 건립·공공기관 혁신 등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퇴행적 시각을 탈피하려는 결연한 의지다.

우리는 어렵고 간단치 않은 문제에 부딪히면 그럴싸한 이론적 틀, 관행에 의존하는 데 익숙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참조용으로 머물러야 한다. 무엇인가 해결하고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다 비우고 고유성과 만나야 한다. 삶의 문제이든, 도시 문제이든 독특한 성질을 건드리지 않고선 같은 상황을 자주 맞닥뜨릴 것이며 거기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