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뜨락에 달빛이 은은하다. 혼자 술을 마시다 달빛에 이끌려 술병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정원이 아름다워 조경상을 두 번이나 받은 우리 아파트 화단에는 매화, 산수유 등 봄꽃들이 피어 화사하다. 새로 지은 무등산아이파크로 이사 오던 해에 분재에서 옮겨 심은 홍매화가 붉게 피어 향기롭다. 이백(李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처럼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니 봄꽃 향기에 술이 취한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은 마누라도 버리고 혼자 살면서 마음껏 술을 마시며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어느 날 달빛 아래 혼자 술을 마시다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과연 주선(酒仙)의 경지에 이른 시선(詩仙)이었다.

담양의 가사문학관에는 선조 임금이 송강 정철에게 하사한 은배가 있다. 선조 임금은 술을 좋아하는 정철에게 하루에 석 잔만 마시라고 술잔을 하사했다. 그런데 정철은 그 술잔이 작다고 크게 늘렸다고 한다. 얼마나 술과 풍류를 즐겼는지 그의 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에는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라고 노래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술을 좋아한 사람이 어디 이백과 정철뿐이겠는가? 술꾼마다 술에 관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중 한 사람이다. 내가 군대생활을 할 때는 낙하산 훈련을 마치고 나면 철모에다 막걸리를 따라 주어 마시게 했다. 공수특전사에서 훈련을 받을 적에는 군화에다 술을 부어 마시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핵 폭탄주가 유행했는데, 맥주컵에 소주를 부운 후 양주를 채워 원샷으로 마셨다. 지금은 소ㆍ맥 폭탄주가 유행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북한의 김정은이 폭탄주 무서워서 남한에 못 온다고 한다. 남한에는 집집마다 핵가족이요, 거리마다 총알택시요, 술집마다 왕대포인데다 심지어 핵 폭탄주까지 마시고 있으니 감히 남한에 오고 싶겠는가?

‘한서(漢書)’에 술은 하늘이 내려준 복이라고 했다. 술은 인간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 최근에 세계보건기구에서 장수비결을 발표했는데, 그중 1위가 “좋은 술을 적당히 마셔라”였다. 술은 잘 마시면 영혼을 즐겁게 하며, 건강에도 좋고, 인간관계를 친밀하게 만든다. 그러나 술은 도깨비 눈물 같아서 잘못 마시면 병이 되고 독이 되어 인생을 망치게 된다.

그러므로 술을 마실 때는 멋과 맛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술과 안주를 먹으며, 분위기 좋은 곳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비로소 멋과 맛이 어우러진 술자리라고 할 수 있다.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봄에는 뜰에서 마시고, 여름에는 교외에서, 가을에는 배에서, 겨울에는 집안에서 마셔야 하며, 밤술은 달을 벗 삼아 마시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긴 목로주점에서 예술을 논하고, 포장마차에서 인생을 이야기하며, 은은한 달빛 아래 꽃뜨락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운치가 있겠는가?

코로나시대에 혼밥, 혼술이 유행하여 가끔 나 혼자 술을 마시곤 한다. 혼술로 좋아하는 포도주를 즐겨 마시면서 적당히 취하니 기분이 좋다. 더욱이 과음으로 인한 실수나 사고가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오늘처럼 아파트 벤치에 홀로 앉아 달빛 아래 봄꽃 향기에 취해서 술을 마시니 주선(酒仙)이 된 듯하다. 시선(詩仙) 이백이나 정철은 술이 취하면 시적 영감이 떠올라 불후의 명작을 창작했다고 한다. 나도 꽃향기에 술이 취해 시선처럼 명작이 떠오른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