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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미의 인디봄 <17> 땅에 쓰는 시

시인 박목월에 인정받은 여성 조경가 사계
건축다큐 정다운 감독 신작
1세대 여성조경가 정영선 조명

2024년 06월 19일(수) 21:34
땅에 쓰는 시
‘내 앞의 아름다움 나는 그곳을 거니네. 내 뒤의 아름다움 나는 그곳을 거니네. 내 위의 아름다움 나는 그곳을 거니네. 내 밑의 아름다움 나는 그곳을 거니네. 아름다움의 자취를 쫓아, 나는 그곳을 거니네. 아름다움과 함께 영원히, 온통 나는 둘러싸이네. 내가 나이가 들어도, 나는 그곳을 거니네. 여전히 움직이면서, 나는 그곳을 거니네. 나는 여전히 아름다움의 자취 위를 맴돌리니 그리고 다시 살리라, 나는 그곳을 거니네. 나의 노랫말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향하네.’-나바하족의 노래

한 아이가 공원을 뛰논다. 계단을 올라갔다가 잠시 멈춰서 아래를 보기도 하고 다시 내려와 또 이곳저곳을 뛰논다. 나무에 숨기도 하고 주저앉아 꽃을 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다리 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아이에게는 공원의 이곳저곳이 커다란 놀이터이다. 영화‘땅에 쓰는 시’의 첫 씬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대한민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이자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 (83)의 그동안의 치열한 작업 정신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담아낸 숭고한 기록이다.



●대한민국 정원 역사 바꾼 인물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같이 일하는 동료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영화를 소개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지역의 공동체 상영회에서 이 영화를 보고 온 직장 동료가 영화와 정영선 선생님에게 매료돼 가드닝이라는 작업에 극찬하며 자신의 과업으로 승화해 내려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의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감동이었을까.

교사였던 아버지의 지인인 시인 박목월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았던 정영선은 종이 위에 시를 쓰는 것 대신 땅에 시를 쓰는 길을 선택했다. 어린 시절 정영선의 자연관을 만들어 준 건 할아버지가 과수원의 바위틈에 심어 너무나도 이쁘게 핀 백합이었다. 그 백합이 아직도 꿈에 나온다는 정영선은 영문과 장학생으로 뽑혔지만 이를 포기하고 농대를 선택, 서울대 환경대학원 첫 졸업생이 되고 83세의 나이인 지금도 땅에 시를 쓰고 있다. 자신을 자연과 현재 삶의 터전을 연결하는 연결사라고 말하는 그녀는 1984년 서울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조경부터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서울아산병원, 예술의 전당, 국립수목원, 대전엑스포, 광화문광장 재정비, 경춘선 숲길, 국립중앙박물관, 호암미술관 희원,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아모레퍼스픽, 성수동 디올하우스 등 대한민국의 정원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정원이라고 하면 사람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서양적인 정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정영선이 추구하는 정원은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연과 정원의 경계가 모호하고 자연과 삶의 터전이 밀착된 자연 친화적인 한국 정원이다. 그 정원에는 개미취, 오이풀꽃, 큰산꼬리풀, 개쑥부쟁이 등 이름조차 낯선 들꽃과 나무와 풀들로 가득 차 있다.“환자는 환자가 아프니깐 울고 싶을 때도 있는데 침대에 앉아서 울겠느냐, 나무 그늘에 앉아서 운다든지… 억장이 무너지는 가족은 환자 앞에서 울겠냐 어디 숨어서 한바탕 운다든지..시달린 의사와 간호사들은 어디서 울겠냐. 충분히 쉴 수 있고 울 수 있고 많은 나무가 있고 그늘이 있고… 환자가 아파 가지고 안 울어본 사람은 모른다.”서울 아산병원 지하주차장 위에 만들어진 숲에는 정영선의 이러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 현재와 미래를 잇는 작업

영화 ‘땅 위에 쓰는 편지’는 단편영화‘한국 현대건축의 오늘:집(2017)’부터‘시간의 건축(2017)’,‘이타미 준의 바다(2019)’,‘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2022)’등 건축물과 공간을 탐구하며 웰메이드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든 정다운 감독의 신작이다. 이번 작품은 그동안 건축물에 집중해 온 정감독이 건축물 주변에 있는 나무, 돌들을 보게 되면서 건축물과 사람, 자연을 이어주는 조경가에 대해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 시작된 작업으로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자연과 공간의 관계성 안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을 전달해 주기 위한 조경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정다운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대한민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철학과 신념, 그리고 정영선의 자연을 고스란히 너무나도 잘 담아냈다. 다큐멘터리는 미래 세대에게 바치는 연서라고 말하는 정감독은 대학시절 극영화를 제작하려다 건축과 공간에 큰 의미를 두고 영국 캠브리지건축대학원에 들어가 자신의 영화 작품에서 어떻게 하면 건축과 공간성을 잘 녹아낼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러던 중 이타미 준(재일한국인 건축가, 유동룡)의 건축물에 빠져들게 되면서 그의 건축물들이 인간을 따뜻하게 위로하기 위한 의미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우연히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더 늦기 전에 그의 이야기를 제작해야겠다고 결심, 만들어진 작품이‘이타미 준의 바다’였다. 자신이 만들어 낸 영화의 시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조금 더 아름다운 모습이면 좋겠다고 말하는 정다운 감독은 사람을 위로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며 자신의 다큐멘터리는 대한민국 사회의 안 좋은 모습을 다루더라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영화‘땅에 쓰는 편지’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람을 위로하려 노력하는 정다운 감독의 영화적 가치관과 한국의 자연경관을 기본으로 거기에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자연과 삶, 현재와 미래를 잇는 작업을 계속 중인 조경가 정영선의 신념이 담긴, 오랜만에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영화이다.



● 팔순 넘은 조경가 열정

현재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맨손으로 땅을 일구고 풀을 심고 색연필로 설계도를 그리고 있는 대한민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 이제는 어린 손주에게 꽃을 다루고 풀을 심는 일을 가르치면서“조경을 꽃이나 나무를 심고 예쁘게 다듬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생태적, 인문학적 관점에서 우리 국토를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마지막 과제”라고 말하는 그의 뒷모습은 풀꽃들을 찾아내고 가꾸느라 오늘도 분주하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한국 정원을 추구해 온 정영선의 삶과 자연과 사람을 잇는 그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자연 정원에서 삭막했던 삶의 치유와 위로를 받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극장으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왠지 오늘부터는 나도 길 위에 아무렇지 않게 피어있는 들꽃들에 하나하나 눈길이 가며 애정을 담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영화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참으로 큰 힘을 가진 예술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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