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글짓기 고등부 대상

평화와 번영의 나무

2018년 12월 13일(목) 17:28
광양고 2학년 1반 강태식
평화와 번영의 나무


인류는 인류의 번영을 위해 많을 일들을 해왔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바다를 배우고 산을 깎았다.

인류는 자신들의 번영을 위해 다른 것들을 파괴하는 일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아가 인류 자신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 절대적인 자원이 모자랐고 그들은 그 자원의 취득을 위해 기꺼히 다른 개체들을 파괴했다.

심지어 동족일지라도.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인류가 쌓아온 기술은 절대적인 자원의 부족을 해결해주었다.

어느정도이기는 하지만 과거와 같이 끼니를 걱정하며 서로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한정되는 자원이 있었고 절대적으로 한정된 자원이 있었다. 그들은 그 자원을 취득하기 위하여 기꺼히 칼을 들었다.

그들에게 있어 협상은 칼을 휘두리기 전 칼에 찔리고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칼에 찔리기 전에 포기할 것이냐를 묻는 상투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다



이러한 이유에 따라 인류가 살아온 역사의 대부분은 피와 광기의 전쟁으로 채워져 갔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압도적인 폭력앞에서 평화를 구하게 되었다.

석기가 청동기로, 청동기가 철기로, 철기들이 총과 대포로, 총포가 미사일이 되고 나서야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구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키워온 폭력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자신들이 무었을 만들었는지 깨닫고 지난 날의 과오를 되돌아 보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번영의 나무를 키워나가기를 꿈꾼다면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전쟁시에는 획일화가 평화시에는 다양화가 이뤄진다. 획일화보다는 다양화가 발전에 도움이 된 사례가 많기에 사람들은 다양화를 지향한다.

과거의 소품종 대량생산 보다는 현재의 다품종 소량생산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며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평화 없는 번영은 장기적으로 존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센 풍랑이 이는 대해에서 조각배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평화 없는 번영은 이와 같다.



지금의 세계에서 전쟁과 평화, 양자 중 평화를 버리고 전쟁을 선택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전쟁에 미친 전쟁광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선택을 하겠는가?

평화란 지금 당장 총성이 멈추고 칼자루를 손에서 놓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위험 요소들이 완전히 제거되고 일체의 불안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전쟁상태에서는 모두가 광기에 휩싸인다. 내가 죽지 않을까, 저 사람이 나를 죽이지 않을까, 나는 ,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등의 의문에 휩싸이고 불안에 빠진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발전한다,

두려움은 그의 육체를 지배하고 나아가 사상까지 조종한다.

전쟁을 조장하는 자들은 그런 심리를 이용해 전쟁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몬다.





그렇다면 전쟁의 목적은 무었인가? 왜 우리는 전쟁을 지양하고 평화를 지향해야 하는가? 전쟁의 목적은 이권에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에 의하여 싸움이 벌어지듯 국가간의 이권에 대하여 전쟁이 발생한다.

전쟁의 발생 단계를 정리하자면 첫 번째 단계는 긴장감의 조성이다. 긴장감이 조성되고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두 번째 단계는 두려움이다. 불안은 두려움으로 발전해 사람들의 사고능력을 마비시킨다.

세 번째 단계는 흥분이다. 사람들는 사고능력을 상실한 체 흥분하고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잊어버린 체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저지른다.

이러한 전쟁은 양자를 파멸시킨다. 과거에는 전쟁이 군대만의 전쟁이었다. 군대끼리 만나 싸우고 승패가 결정되어 패자는 승자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전쟁은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아닌 한 국가와 국가의 싸움, 다시말해 건곤일척의 승부가 되었다.

한번에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흔들린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오직 산 자와 죽은자만이 남는 전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조금이나마 산 자들은 그들의 세계를 다시 재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핵 무기라는 가공할 무기가 개발되어 전쟁을 산 자와 죽은 자가 아닌 죽은 자의 전쟁으로 만들어 버렸다.

플라톤이 말했듯 죽은 자 만이 전쟁의 끝을 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플라톤은 핵무기가 발명될 것을 상정하고 발언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말은 맞았다.)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전쟁을 지양해야 한다.

전쟁의 양사잉 달라졌다. 군대와 군대가 맞서 군인들이 죽고 끝나는 싸움이 아닌 구성원들의 전멸하는 싸움의 시대로 바뀌였고 심장을 꿰뚫는 총알은 땅의 생명을 끝내고 땅 위의 모든 것을 없에는 핵으로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시대가 비뀌었다면 그 시대의 사는 사람들도 바뀌여야 한다

. 사람이 시대를 바꾸는 일이 사리에 맞는 일이겠지만 어째 이상하게 시대가 먼저 바뀌고 그에 맞추어 사람들이 바뀌는 느낌이다.



전쟁의 목적은 이권이었고 이권은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이었다. 전쟁의 패혜가 전쟁이 가져오는 풍요를 넘어버렸다.

전쟁은 이제 오직 파괴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전쟁이 가져오는 풍요가 패혜를 넘어선다고 해도 전쟁은 궁극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전쟁은 너무나 많은 상흔을 남긴다. 한 사람에게, 한 가정에, 한 마을에, 한 공동체에 불가역적인 상처를 남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번영을 향해 나아가는 효율적인 길은 전쟁이 제외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그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



평화를 향한 길을 걸으려면 무었이 필요한가? 평화를 향한 첫 걸음은 손에 쥔 칼자루를 내려놓음으로 상대에게 전쟁을 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하는데 있다.

평화를 저해하는 불안은 상대를 불신함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니 상대를 일차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 그 신뢰가 부서질 경우를 항상 대비하여야 한다.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팔을 벌리되 언제나 그 칼을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내가 먼저 아귀에 쥔 자루를 놓고 팔을 벌린다면 상대는 자연스레 자루를 놓고 내 품에 안길 것이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조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멈추는 것으로 평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아궁이의 불이 꺼진 것처럼 보이지만 잿더미를 뒤집어 보면 새빨간 불씨는 언제라도 다시 불길을 일으킬 준비를 마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멈추는 것은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언제라도 비슷한 이유로 전쟁이 벌어질 수 있으며 더욱 심각해 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되돌아봐 이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1차대전의 종결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아궁이에 땔나무를 넣는 일을 중단한 것 뿐이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자 아궁이는 다시 새차게 불길을 일으켰다. 2차대전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아궁이의 불씨까지 꺼트려야 한다. 신뢰를 구축해 대화분위기를 조성하고 대화를 통해 조정을 시작해야한다.

너는 나에게 무었을 줄 것이고 나는 너에게 무었을 줄 것이다.를 정확히 정의해 차후 시비의 여지를 없에고 항구적 평화를 창출해 번영을 추구하는 일이다.



세계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먼저 아귀의 칼자루를 내려놓는가 였다.

먼저 칼자루를 내려놓고 팔을 벌린다면 저 자의 칼이 내 심장을 향하지 않을까라는 불안이 그들의 아귀에서 자루를 내려놓는 일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물론 작심하고 아귀에 힘을 주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로 인해 파멸했고 파멸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느 사람들은 현재 우리와 대적중인(아직은 완전한 종전협정이 이뤄지지 않았음으로) 자들을 향해 칼자루를 더욱 강하게 쥐고

그들은 우리의 적임을 강조했으나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의 적이기는 하나 경우에 따라 적이 아니라 동반자가 될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들이 우리의 적이라는 프레임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지만 가능성을 보자는 프레임은 상황을 진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번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적이고 평화를 위해서는 긴장의 해소와 신뢰의 구축은 필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나무를 보고 그저 나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무를 보고 장차 그 나무가 이룰 산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무를 보고 나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귀에 힘을 주었지만 숲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귀에 힘을 풀고 팔을 벌렸다.

무의미한 대치는 끝나고 대화가 시작되자 두 사람은 칼을 들고 서로의 심장을 겨누던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사실 그들은 팔이 아픈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살기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누군가 한명이 칼을 내리자 나머지 한명도 칼을 내려놓았다.



신뢰를 위한 첫 걸음을 때었으니 이제 두 번째 걸음을 내딛을 차례이다.

우리는 이제 대화를 시작해 우리가 뭘 원하고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상대가 무었을 원하는가 우리가 무었을 바라는가에 대한 의견을 충분히 나누고 적절한 타협점을 정해 서로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야 한다.

일방적인 요구나 일방적인 수용은 자속적인 관계와 공정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 좋지 않은 일이니 지양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여러 회담을 통해 거쳐왔으니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의견을 조율하던 중 입장의 차이가 커져 조율과정 자체가 중단되거나 적법한 절차를 거쳐 조율된 의견을 한측이 일방적으로 폐기하거나 준수하지 않아서였다.

이 또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있다.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지난 선택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러한 일들이 벌써 몇 년동안 몇 번이나 반복된 결과 사람들은 상처입고 불신하거나 다시 증오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일관성 없는 태도나 우리의 좁은 시각 모두가 문제이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기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언제나 미묘하게 엇갈리고는 했다. 상대가 좋다면 우리가, 우리가 좋다면 상대가 좋지 않은 일들 이 반복되었다.

이런 일들은 조율하는 의견에 대한 온도차를 만들었고 양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하는데 큰 어려움을 주었다.



온도차를 맞추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과거에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모든 문제를 짊어지고 행동했지만 현재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 문제를 짊어진다.

우리의 지도자는 우리의 의견을 대표하고 수행할 뿐 자신의 의사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행사할 권리는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지속적인 신뢰 구축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그 일이 필수적임을 사회와 지도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지도자가 그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면 지도자의 행동을 주시하며 의견을 제시하면 되는 일이고 지도자가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구성원들의 의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면 그에 따른 의견을 제시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가 무덤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처럼 그 행동을 평가하려면 조금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

자신의 살에 칼을 박아 넣어 살을 도려내는 행위가 당장에는 미친 일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그 살이 썩어가는 환부였다면, 종양이 증식하는 부분이었다면 그 일은 미친 일이 아니라 합당한 일이 된다.

우리는 일희일비하다가 좋은 기회를 놓친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례를 반영해서라도 조금 신중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물고기를 잡고자 한다면 그물을 바다에 던져야 하고 나무를 키우고자 한다면 묘목을 심던 시앗을 심던 일단 땅을 파야한다.

종에 따라 파는 깊이는 다르겠지만 일단 삽을 들고 땅을 파야한다.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 땅을 파는 일이다.

평화의 나무를 기르려면 깊은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하고 건강한 나무를 키우려면 뿌리가 깊이 뻗어나가야 한다.



땅을 파고 씨앗을 심는 것만으로 나무는 자라지않는다. 물과 햇볕이 충분이 제공되어야만 가지를 기르고 나뭇잎을 피울수 있다.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 땅을 파는 일이라면 상호 의견을 교류하는 일은 물을 주는 일이라고 할 수있다.



의견을 교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서로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앞으로의 전략을 새우는 일을 가능하게하는 의견교류는 더욱 중요하다.

일단 뭘 알아야 하든지 말든지를 결정할 수 있느니 말이다.



정기적인 접촉과 비정기적인 접촉을 통해 의견을 교류해 서로가 원하는 요구사항을 교류하고 각자의 시정에 맞추어 차근차근 시행해 나간다면 점진적 발전이 있을 것이고 시행하는 결과가 성실성과 진실함을 갖춘다면 신뢰 또한 배가 될 것이다.

파국을 맞이하는 경우들을 살펴보면 정보의 교류가 잘 이뤄지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감행하고 그로 인해서 신뢰를 잃는 일이 많다.

하지만 현재의 비정기적인 접촉에 정기적인 접촉 조건을 추가한다면 그러한 일들은 정기적 접촉 이전에 비해 줄어들 것이다.



1차적 신뢰를 구축하고 지속적인 의견교류를 통해 신뢰를 쌓아간다고 해도 실질적 성과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평화를 이뤄냈다고 말하기 힘들다.

6.25 전쟁 때처럼 휴전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주장하여 무의미한 교착상태가 이어지고 인적,물적 손해가 증가하던 상황을 미루어 판단할 때 실질적 성과가 없는 과정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특정 경계선을 다룬다면 그 경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지를 명확히 정하고 그 경계를 정해야지 명확하지 않은 경계를 설정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지키지 않는 일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교류한 의견을 합리적으로 검토해 실행에 옮겨랴 한다. 단 우리가 일방적으로 실행에 옮길 필요는 없다.

실행에 옮기되 상대의 실행여부를 고려하며 진행해야한다.

물론 맹신을 피하듯 근거없는 의심또한 피해야 한다. 상대는 꾸준히 조율내용을 실행에 옮기는데 우리는 그 내용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불신을 심어줄 것이고 지속적인 교류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상대와 신뢰를 구축하고 의견을 조율해 서로의 요구사항의 절충안을 도출하고 그 절충안을 시행하는 일이 이뤄진다면 진정한 평화가 이뤄질수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긴장이 완화되고 차후의 분쟁발생 가능성까지 모두 제거된다면 사회는 잠재위협을 상정하고 대비하는 비용들을 절약하고 다른 분야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사회의 효율성이 증대된다면 그 열매는 구성원들에게 주어질 것이고 구성원들은 사회에 만족할 것이다.





삽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굳은 땅을 파낼 수 있는가? 단단히 굳어버린 땅에는 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 우리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과 말이다.

앞서 서술한 이야기, 번영의 나무가 자리를잡는 일은 평화가 싹을 틔울때만 가능한 일이다. 평화가 싹을 틔울려면 땅속에 신뢰를 심어야 한다.

신뢰를 심기위해서는 땅을 파내야 하고 땅을 파내기 위해서는 삽이 땅 속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땅에 삽조차 들어가지 않는 굳은 불신에 직면해 있다.

물론 삽이 땅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땅이 굳세기만 해서는 아니다. 우리가 쓰는 삽의 자루가 썩지는 않았는지. 삽의 머리가 뭉툭해지지 않았는지도 재고해봐야 할 일이다.



단단히 굳은 땅을 촉촉하게 만들어 삽머리를 들어가게 하는 일은 건물을 세울 때 기초를 다지는 일처럼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벅찬 일은 우리의 손으로 해결하려 끙끙거릴 필요는 없다.

처음과 끝 모두를 우리의 손으로 끝내야만 하는 일들도 있지만 다른이의 손을 빌려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있다.

하나 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소수보다는 다수가 강하다. 타 공동체와 공조를 통하여 굳센 땅을 부드럽게 만들거나 삽머리를 연마시키던 국면의 진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국제공조의 힘은 이미 오래전부터 증명되어왔다. 2번의 세계대전에서 공조를 통한 대항은 승리를 안겨주었고 현재에도 NATO등의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국제기구는 한 공동체가 해결하기 힘든 일을 함께 해결하는 것을 돕는다.

6.25의 사례, 보스니아 내전의 사례 등을 살펴면 국제공조가 이뤄짐으로 국제기구의 개입이 결정되고 사태의 양상이 호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스니아 내전을 제하고도 6.25.를 살펴보면 UN의 다국적군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아마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국제기구와의 공조는 무력을 통한 압박전력이 아닌 경제제재를 통한 압박전략이다. 무력압박과 유사하지만 압박의 수단은 다르다.

무력압박이 상대를 전쟁터로 내모는 경우가 많다면 경제압박은 상대를 회담테이블로 이끄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였다. 자연과의 투쟁, 굶주림과의 투쟁, 사상과의 투쟁, 공포와의 투쟁, 투쟁과의 투쟁,,,,,,. 우리는 이제 투쟁과 투쟁에 끝을 낼 때가 왔다.

투쟁은 인류를 진보시켰음이 틀림없다. 서로 다른 문명의 산물을 전파시키고 사람들을 계몽시켰다.

그러나 그 투쟁의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사라져 마땅한 이들도 있었지만 사라지기에는 죄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는 이제 뒤를 바라보며 앞으로 걸어야 한다.

역사가 주는, 투쟁이 주는 교훈을 마음에 세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냉철한 사회에서는 힘들겠지만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다가는 자세를 가지고 행동해야한다. 상대에게 간담을 내보이고 염통을 내 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가되 언제나 에상치 못할 사태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에서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았다. 온 세계를 덮는 숲을 보았다. 우리는 나무를 심었다. 굳센 땅을 삽으로 파고 그곳에 신뢰를 심었다.

그곳에서는 평화가 움틀 것이다. 평화는 자라 번영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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