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용과 떠나는 역사여행<38> 삼의사묘와 백범 김구

용산 효창공원서 되새겨보는 역사

2018년 12월 19일(수) 17:14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옮겨와 용산 효창공원에 묘를 조성했는데, 이 세 분의 묘를 합쳐 삼의사 묘라고 한다.
백범김구기념관에 들어서면 대형 태극기와 함께 김구 좌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3월 새학기에 시작된 시대순 역사여행 프로그램이 12월이 되면 막바지 일제강점기 역사에 이릅니다. 일제강점기 역사여행으론 일제의 식민지 수탈 현장이나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흔적을 찾아갑니다.

출발 버스에서 질문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하면 누가 제일 먼저 떠올라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안중근, 윤봉길, 김구, 유관순. 어디서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불려지는 이름들입니다. 그 중 안중근, 윤봉길, 김구 그리고 이봉창 의사를 더해 네 분의 무덤이 완전하지 않지만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요.





효창공원은 효장운동장이라는 축구 경기장을 포함하고 있어 예전 축구중계방송으로 귀에 익어 이름이 생소하진 않습니다.

효창공원의 원래 이름은 효창원이었습니다. 효창원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입니다. 옛날엔 무덤에도 계급이 있어 왕이나 왕비가 묻히면 ‘능’이라 불리고, 세자나 세자빈은 ‘원’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문효세자가 5살 어린나이에 죽고, 그의 어머니 또한 몇 개월 후에 죽자 무덤풍수를 소중히 여기던 때인 조선후기엔 명당에 무덤을 썼겠지요. 능이나 원은 왕실의 무덤이라 능원을 감싸는 숲은 관리되었고, 도시 개발과정에서도 비켜나가 숲이 보존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명당에 자리한 식민지 왕조의 무덤은 중시되질 않습니다. 효창원 또한 세자와 그의 어머니 무덤이 옮겨지고, 일제의 군부대 주둔지가 되어 내내 보존되던 숲은 군부대 생활 편의로 잘려지고 훼손됩니다.

일제는 결국 패망하고, 타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귀국후 이듬해 무덤으로서 명당인 효창원 자리에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옮겨와 묘를 조성합니다. 이 세 분의 묘를 합쳐 삼의사 묘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삼의사묘는 봉분이 네 개입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는 누구의 묘라는 비석과 함께 있고, 맨 우측 묘에는 봉분만 있고 비석없이 작은 표지석에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알림글이 보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식민지 강탈의 발판을 마련한 식민지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1910년 중군 여순(뤼순)감옥에서 순국하지요.

안중근 의사가 동생에게 전했다는 유언이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지금 안의사의 묘는 중국 여순 감옥 어느 인근에 있을 뿐 정확히는 모릅니다. 백범 김구가 시도했고, 북한에서도 찾으려 했으며, 한중 수교이후 정부차원에서 현장에 인원을 파견해 조사해 보지만 아직 못찾고 있습니다. 어쩌면 영영 안의사는 이국땅에 묻혀있을 수도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 앞에 서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라도 죄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삼의사 묘 위쪽으로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몇분의 독립운동가 묘가 있고, 백범 김구 또한 그 인근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묘 앞에는 2002년 백범김구기념관이 세워져 김구의 일생과 함께 우리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곳으로 자리매김 됩니다.

백범김구기념관을 들어서면 대형 태극기와 함께 김구 좌상이 우리를 맞이하고, 전시관은 김구의 유년기부터 시작해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고, 한반도 분단을 막아보려는 그의 노력과 함께 명을 달리했던 생애가 시간순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전시품에 눈이 갑니다. 돌아가실 때 입었던 피묻은 하얀 상의.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윤봉길 이봉창 의거를 만들어내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던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일제는 중국은화 60만원의 현상금을 겁니다. 지금 돈으로 355억 된다고 합니다. 그 높은 현상금에도 잡히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던 그는 해방이 되고 그렇게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지 5년이 채 안되어 대한민국 초급 장교의 총탄에 명을 달리합니다.

총을 쏜 군인은 무기수였다가 몇 달 안되어 풀려나오고, 다시 군대로 복귀했다가 사업가로 변신하였고, 이름을 바꾸어 숨어 살지만 김구 암살범을 응징하려는 일반인들에게 테러를 당하다 늘그막에 마침내 한 시민에게 맞아 죽습니다.

일제 식민지 결과로 분단된 남과 북은 여전히 대결중이고, 통일을 그토록 염원하던 김구 죽음으로 이익을 본 무리들은 한 세대를 이어 아직도 여전히 한반도의 운명을 쥐고 있는 듯 보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는데, 삼의사묘와 백범 묘소에서 지난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잊으면 안되니까요.

/체험학습 동행(historytour.co.k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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