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라이트

김향남(수필가·문학박사)

2021년 09월 15일(수) 09:14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 있고 사방은 고요했다. 왁자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홀로 빠져 나오기란 생각보다 쓸쓸한 일이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니. 나는 거의 참석을 못 하거나 한다고 해도 중간쯤에나 갔다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반이라도 걸쳐놓고 집으로 오는 길엔 왠지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둠 속을 달려가는 그 틈새가 호젓하니 좋았다.

리조트 밖의 공기는 서늘했다. 어둠에 잠긴 바다 끝에 불빛이 가물거렸다. 바닷가를 따라 다듬어 놓은 산책로는 멀리까지 구부러져 돌아갔다. 나는 잠깐이라도 저 길을 좀 걸어볼까 하다 관두었다. 대신 이다음 어느 날,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쯤 이곳에 와서 밤이 깊도록 슬카장 놀다 가리라 마음을 다독였다.

건너편 언덕배기에 높이 솟은 건축물이 보였다. 비상하는 새의 형상을 한 지붕이 어둠에 싸인 채 푸르스름한 빛을 뿜고 있었다. 아마도 최근 지어졌다는 국제 음악당일 것이다. 세계적인 규모라는 저 클래식 음악당은 예술의 도시를 꿈꾸며 일궈낸 이곳 사람들의 긍지이자 자부심일 것이다. 아름다운 해안, 천혜의 경관만 해도 이미 명소라 할진대 저토록 근사한 공간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니 금상첨화(錦上添花)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나는 또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다음 어느 날, 저 음악당 객석에 앉아 감미롭고도 우아한 시간을 한량없이 누려 보리라.

나는 사뿐사뿐 주차장으로 갔다. 어둑신한 주차장엔 차들이 빼곡했다. 이 많은 차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내 차는 또 어디쯤에 있는 건지. 나는 기우뚱기우뚱 두리번두리번 차를 찾아 헤맸다. 어둠 탓이기도 하고 내가 신은 하이힐 탓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발아래 깔린 자갈들이었다. 아무리 살금살금 걸어도 무사통과하기는 어려웠다. 우둘투둘한 바닥을 걸어 겨우 차에 탔다.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맞추었다. 지금부터 좀 세게 밟으면 두 시간 후쯤엔 집에 도착할 것이고 씻자마자 바로 누우면 서너 시간은 잘 수 있을 것이다. 헤드라이트를 켰다. 빛은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불빛에 드러난 몇 개의 현수막이 뜬금없이 눈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강제수용 결사반대

-단결 투쟁

굵게 흘려 쓴 구호들이 허름한 집들 사이에 넝마처럼 걸려 있었다. 그것은 혈서처럼 붉고 맹서처럼 굳건해 보였다. 담벼락엔 ‘민박집’이라고 써놓은 글귀가 멀뚱하니 붙어 있고, 곧 헐려 나갈 듯 숨죽인 집들이 낮게 웅크리고 있었다. 검게 솟은 나무그림자가 지붕들을 덮고 그 틈새로 신음처럼 낮은 음조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이 아름다운 항구에 저토록 완강한 외침이라니. 내용이야 어찌 됐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난제가 펄럭이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밤의 적막 속에 문득 내 앞을 막아선 형국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전망 좋은 방에서의 즐거운 한때, 잘 닦인 바닷가를 걷거나 편안한 객석에 앉아 음악에 취하는 것. 그런 것들이 어쩌면 누군가의 신음을 외면한 결과는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저 결기 넘치는 비장한 절규들이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쉽사리 자리를 뜨기도 어려웠다.

나는 한참이나 불빛에 비친 현수막과 낮은 지붕들, 그 위로 펼쳐진 푸른 날개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러다 퍼뜩 가속페달을 밟았다. 바퀴 아래서 자갈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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